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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 한표가 ‘1965 상파울루 비엔날레’ 그랑프리 바꿨다”

등록 2017-10-20 11:00수정 2019-01-29 03:07

【길을 찾아서】 (37) 상파울루 비엔날레 첫 한국인 심사위원

김병기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서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를 맡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에서 열리는 남미 최대 국제미술전에 참가했다. 현지에서 70개 나라 대표 가운데 한국인 처음으로 15명의 심사위원에도 뽑혔다.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가 설계한 주전시장 파빌량 비에나우는 3만 제곱미터의 공간에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진 상파울루 비엔날레 누리집 갈무리
김병기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서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를 맡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에서 열리는 남미 최대 국제미술전에 참가했다. 현지에서 70개 나라 대표 가운데 한국인 처음으로 15명의 심사위원에도 뽑혔다.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가 설계한 주전시장 파빌량 비에나우는 3만 제곱미터의 공간에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진 상파울루 비엔날레 누리집 갈무리

1961년 6월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의 한국 출품작가 전시가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다. 35살 미만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본전시는 프랑스 파리에서 9월에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앞서 파리국제청년작가 비엔날레 본부는 한국 정부로 초청장을 보냈고, 정부는 이를 현대미술가협회에 의뢰했다. 이에 협회는 김환기·유영국·김병기·권옥연·방근택을 출품작가 선정위원으로 뽑았다. 여기서 선정된 작가는 애초 김창열·정창섭·조용익·장성순·정영열·정상화 등 10명과 재불작가로 박서보·변종하 등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파리 현지로 확인한 결과, 출품작가는 4명 이내였다. 이에 김창열·정창섭·장성순·조용익으로 압축하고 출품작도 2점씩 조정해야 했다.

그때 정부(문교부)는 파리 비엔날레의 한국 대표로 김병기를 정식 임명했다. 국제전 전시기획 담당이라는 커미셔너, 생소한 이름의 직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감일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당시 <도록> 글에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평론가 이일은 “마침내 추상화가가 현 한국 예술의 유일한 전위적 운동, 지도적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제전 참가는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모든 것이 처음 벌어지는 일인데다 준비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분란의 대상이기도 했다. 1963년에는 그 소동의 절정이었다. 그해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커미셔너 김환기)와 ‘파리비엔날레’(커미셔너 김창열) 참가를 위한 작가 선정이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출품작가 선정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미술가들은 연판장을 작성했다. 108명의 작가가 서명했다. “문교부가 한국미협에 위임한 출품작가 선정은 그 방법이 무능했고 극소수의 추상작가에 국한되어 고의건 과오건 편파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미협의 작가 선정 방식 불신, 구상과 추상의 공동 참여, 국전 추천 작가와 재야 작가의 책임 추천, 작품 본위의 심사’ 등을 주장했다.(<경향신문> 1963년 5월25일치)

김병기는 1961년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선임됐으나 정부의 미숙한 처리로 현지 참가는 못 했다. 그때 파리에서 활동하며 대신 한국대표를 맡은 화가 박서보(맨 왼쪽)와 평론가 이일(왼쪽 둘째)이 파리 전시장에 걸린 화가 김창열의 출품작 앞에서 백선엽 주프랑스 대사와 노영찬 영사관과 함께 했다. 사진 조용익 화가 제공
김병기는 1961년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선임됐으나 정부의 미숙한 처리로 현지 참가는 못 했다. 그때 파리에서 활동하며 대신 한국대표를 맡은 화가 박서보(맨 왼쪽)와 평론가 이일(왼쪽 둘째)이 파리 전시장에 걸린 화가 김창열의 출품작 앞에서 백선엽 주프랑스 대사와 노영찬 영사관과 함께 했다. 사진 조용익 화가 제공

1961년 파리청년비엔날레 첫 초청
한국 커미셔너 뽑혔으나 참가 ‘불발’
“그때 파리 갔다면 운명 달라졌을 것”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
박서보·김창열·권옥연·김종영 등 선정

“처음 타본 비행기에서 ‘랭보’ 읊었다”
뉴욕서 만난 김환기 ‘포옹 인사’ 조언

70개 참가국 중 15명 ‘심사위원’ 뽑혀
심사위원장 프랑스 비평가 라세뉴 제안
“바자렐리 대상 밀면 이응노에 명예상”
작품 끌려 ‘부리’에 투표…첫 공동수상

1961년 프랑스에 머물며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 첫 참가 때 김병기 대신 커미셔너 겸 출품 작가로 활동한 박서보(왼쪽)와 1963년 3회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로 김창열의 젊은 시절 모습.
1961년 프랑스에 머물며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 첫 참가 때 김병기 대신 커미셔너 겸 출품 작가로 활동한 박서보(왼쪽)와 1963년 3회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로 김창열의 젊은 시절 모습.

-1961년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선임되었다. 그때 상황은 어떠했는가?

국제전 참가 경험이 없던 시절이어서 모든 것이 미숙할 때였다.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제2회 파리비엔날레’는 청년작가를 위한 국제전이었다. 베니스(베네치아), 상파울루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혔다. 약 50개 나라 가운데 한국도 초청받았다. 첫 참가여서 그 과정이 어려움 투성이였다. 작가 선정부터 작품 운송 등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정부가 나를 커미셔너로 선정하고도 공식 임명 절차는 물론 업무를 제대로 이행하도록 협력체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내가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였다는 사실 자체도 그동안 잊혔고, 근래 와서 우연히 재확인되었다. 만약 그때 커미셔너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고, 또 파리에 갔다면 나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파리는 청년 시절부터 동경하던 예술도시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그즈음 파리에서 머물고 있던 작가 박서보와 평론가 이일이 나 대신 커미셔너를 맡게 됐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도록 표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도록 표지.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도록에 실려 있는 한국편 소개글. 커미셔너 김병기의 글과 출품작가별 작품 목록이 들어있다.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도록에 실려 있는 한국편 소개글. 커미셔너 김병기의 글과 출품작가별 작품 목록이 들어있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도 선임되었다. 어떤 활동을 했는가?

“당시 한국미협 이사장은 당연직으로 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되었다. 나도 이사장 자격으로 전임 김환기 이사장처럼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를 맡은 것이었다. 나는 출품작가로 우선 박서보·김창열·정창섭을 선정했다. 이들은 현대미술 운동에 앞장섰던 화가들이어서 국제현대미술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한 세대 아래였는데, 주변에서 ‘현대미술’만 배려했다고 항의해 뒤에 권옥연과 이세득을 추가했다. 그리고 조각의 김종영과 전통회화의 이응노를 선정했다. 이응노는 그때 이미 파리에서 살고 있어서 출품작을 상파울루로 직접 운송하도록 했다. 국비 지원의 국제행사였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서영화 부문에 권옥연은 메아리, 우화, 수정3점을 출품했다. 도록에 제목없이 실려 있는 작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서영화 부문에 권옥연은 메아리, 우화, 수정3점을 출품했다. 도록에 제목없이 실려 있는 작품.

권옥연의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과 비슷한 1984년작 올드 스토리.
권옥연의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과 비슷한 1984년작 올드 스토리.

상파울루에 가기 위해 드디어 김포공항으로 갔다. 장마철의 여름이었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오르니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또 다른 세계를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절을 읊었다. “오, 용골이여, 때려 부서져라. 나는 바다로 간다.” 여기서 용골은 배의 구조를 말한다. 그런 용골이 부서질 정도라면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랭보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으로 열아홉살 이전에 걸작을 다 쓰고, 그 이후 방랑을 거듭하다 서른일곱에 숨진 시인이다. 장편시 ‘술 취한 배’로 유명하지만,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은 대표작이 있다. 더불어 나는 북구지역의 민요 같은 시구절도 읊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음미하는 습관이 있었다. “산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산 저쪽을 향하여 비행기는 날아갔다.

비행기는 브라질에 앞서 미국 뉴욕에 착륙했다. 나는 상파울루 전임 커미셔너인 김환기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록펠러재단의 연구기금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뉴욕을 경유해야 했다. 컬럼버스 애비뉴의 반지하에서 살고 있던 김환기 집을 찾았다. 김환기는 나에게 충고했다. “김형, 상파울루 사무국에 도착하면 사무국장인 백인 여성이 맞이할 것이요. 말도 잘 통하지 않을 테니 무조건 두 번 포옹하는 서양식 인사를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오.” 나는 사무국에 도착하자마자 김환기의 충고대로 포옹하는 인사를 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환상적’인 인사 방법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생전 처음 서양 여성을 껴안았다. 마흔아홉의 나보다 그 여성은 어렸으나 더 노숙해 보였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1963년에 이어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초대작가로 참가한 김환기의 작품 가운데 ‘아침의 메아리’. 도록에 실려 있는 사진.
1963년에 이어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초대작가로 참가한 김환기의 작품 가운데 ‘아침의 메아리’. 도록에 실려 있는 사진.
뉴욕시절인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김환기의 ‘아침의 메아리’ 원본. 사진 환기미술관 제공
뉴욕시절인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김환기의 ‘아침의 메아리’ 원본. 사진 환기미술관 제공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김한기 ‘에코3’ 개인소장.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김한기 ‘에코3’ 개인소장.

-비엔날레의 한국 작품은 어떤 반응을 얻었는가? 그리고 심사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어떻게 심사를 했는가?

“무려 70개 나라가 참가했는데, 한국 작품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기할 사항은 내가 심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점이다. 70명의 커미셔너 가운데 심사위원 15명을 뽑았다. 그 명단에 내 이름이 끼었다는 것, 즉 국제전 최초의 한국인 심사위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선임되니 나를 대하는 참가 작가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듯했다. 그랑프리를 의식하기 때문이었다. 개막 전야제 파티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특히 바넷 뉴먼, 프랭크 스텔라 등이 참가한 미국의 파티는 화려했다. 나는 파티에서 바넷 뉴먼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아양 떨듯 친절을 베풀었다. 상파울루에서 뉴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니, 그는 자신의 뉴욕 화실을 꼭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그의 작품이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템 폴과 같다고 하니, 그는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바넷 뉴먼은 대상 후보에 끼지 못했다. 그날 전야제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프랭크 스텔라 작품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는 기하학적으로 선을 지그재그 디자인한 그림을 바닥에 눕혀 진열했다.

스위스의 장 탱겔리는 기계를 다뤄 움직이는 입체작품을 출품했다. 그의 작품도 대상 후보에 올라 심사위원들과 함께 확인하러 갔다. 그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탱겔리는 현장에 나와 자신의 작품을 만지면서 뭔가 쇼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의 태도가 작가답지 않다고 느꼈다. 전시에 출품했으면 일단 그것으로 끝이지 더 이상 무엇을 손질한단 말인가. 일본의 추상표현주의 계열인 스가이 구미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의 비셀이란 화가는 1천호도 넘는 대작을 출품했다. 화면을 빗자루로 쓴 것 같은 내용이었다.

196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자코메티의 생전 마지막 전시회. 김병기는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이 전시회에서 자코메티를 만났다.
196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자코메티의 생전 마지막 전시회. 김병기는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이 전시회에서 자코메티를 만났다.

자코메티는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조각이 아닌 회화작품을 출품했다. 1965년부인 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 베르겔 스튜디오-샤이데거 사진.
자코메티는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조각이 아닌 회화작품을 출품했다. 1965년부인 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 베르겔 스튜디오-샤이데거 사진.

하지만 규격이 크다고 인상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자코메티의 조각품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조그만 소품 댓점을 출품했는데, 기법은 기왕의 조각 방식과 달랐지만 호소력이 컸다. 사실 나는 뒤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자코메티 개인전을 관람했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의 안내로 미술관에 갔는데, 마침 그날이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자코메티는 술을 한잔 마신 것 같았고, 수수한 홈스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김향안이 나를 상파울루 비엔날레 심사위원이라고 소개까지 했는데도, 그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작품을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다. 비록 내게는 푸대접이었지만 자코메티의 태도에서 진정한 작가의 모습을 보고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자코메티는 그 개인전 직후 작고했다. 그래서 나는 자코메티의 마지막 전시에서 마지막 날 악수한 사이가 되었다. 헨리 무어가 플러스 기법으로 작품을 했다면, 자코메티는 마이너스 기법으로 작업했다고 볼 수 있다. 막대기같이 기다란 인간상은 현대인을 상징했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도 자코메티를 높게 평가했다.”

1958년 자크 라세뉴(왼쪽 셋째)의 초청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 이응노(오른쪽 넷째)는 65년 라세뉴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인 특별상을 받았다. 62년 파리 파세티 갤러리에서 관장 라세뉴와 한국 화가 방혜자(왼쪽 둘째)가 이응노·박인경(맨왼쪽) 부부의 전시회 개막을 축하하고 있다. 대전이응노미술관 제공
1958년 자크 라세뉴(왼쪽 셋째)의 초청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 이응노(오른쪽 넷째)는 65년 라세뉴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인 특별상을 받았다. 62년 파리 파세티 갤러리에서 관장 라세뉴와 한국 화가 방혜자(왼쪽 둘째)가 이응노·박인경(맨왼쪽) 부부의 전시회 개막을 축하하고 있다. 대전이응노미술관 제공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명예대상 수상작인 이응노의‘콩포지시옹’(Composition). 대전이응노미술관 제공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명예대상 수상작인 이응노의‘콩포지시옹’(Composition). 대전이응노미술관 제공

-그해 비엔날레의 대상은 누가 차지했고, 어떻게 뽑았는가?

“프랑스의 커미셔너인 라세뉴가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그는 나에게 멋진 제안을 했다. 프랑스 출품작가인 빅토르 바자렐리를 대상으로 밀어준다면, 한국 작가 이응노를 명예상으로 추천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작가에게 상을 주겠다는 제안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나는 즉석에서 동의를 했다. 특별상 같은 명예상은 이미 63년 김환기가 수상한 적이 있었다. 이항성이 미술 교과서를 만들 때, 나는 서양화 편을, 이응노는 동양화 편을 집필해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막상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바자렐리의 작품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공동 그랑프리 수상자인 이탈리아 알베르토 부리의 작업 모습.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공동 그랑프리 수상자인 이탈리아 알베르토 부리의 작업 모습.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공동 그랑프리 수상작인 알베르토 부리의 ‘레드’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공동 그랑프리 수상작인 알베르토 부리의 ‘레드’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공동 그랑프리를 받은 프랑스 빅토르 바자렐리의 ‘콰드라투라(정방형) 1956 60’. 도록에 실린 사진.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공동 그랑프리를 받은 프랑스 빅토르 바자렐리의 ‘콰드라투라(정방형) 1956 60’. 도록에 실린 사진.

빅토르 바자렐리는 종이로 특유의 기하학적 무늬의 반복하는 옵아트를 창시했다. 1978년 사진.
빅토르 바자렐리는 종이로 특유의 기하학적 무늬의 반복하는 옵아트를 창시했다. 1978년 사진.

바자렐리는 종이를 오려 붙여 옵티컬 아트 작업을 했다. 그나마 작가가 직접 하지 않고 직공들이 종이를 붙인다 했다. 규칙적으로 붙이면 디자인이 되지만 한쪽 구석을 찌그러트려 파격을 주면 회화작품이 되는 식이었다. 그게 바자렐리였다. 사실 그는 프랑스 사람도 아니고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나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참가한 화가였다. 그런 내가 시각적 착시 효과나 노리는 작업에다 대상을 안겨줄 수 없었다. 양심의 가책이 생겼다. 도저히 바자렐리에게 표를 줄 수 없었다.

나는 라세뉴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부리에게 투표했다. 원래 헝가리 출신인 부리는 외과의사로 수술 부위를 실로 꿰매는 작업에 능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리는 미군 포로가 되었다. 텍사스 수용소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습성대로 찢긴 마대를 꿰맸다. 구멍 난 마대 바탕에 빨간색을 칠하니 마치 피부의 상처처럼 보였다. 피 묻은 붕대같이 보이기도 했다. 부리는 전쟁이 끝난 뒤 의사 생활 대신 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탈리아의 대표 작가로 성장해 상파울루 비엔날레까지 오게 된 것이다.

드디어 비엔날레 대상의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이 왔다. 결과는 나를 놀라게 했다. ‘알베르토 부리 8표, 빅토르 바자렐리 7표.’ 나의 1표 때문에 순위가 뒤바뀌었다. 심사위원 15명 가운데 아시아는 오로지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투표 결과를 보고 유럽의 한 심사위원이 즉석 제안을 했다. 너무 근소한 1표 차이이니 공동수상자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다른 심사위원들은 동의했고, 다만 대상 발표는 부리를 먼저, 그다음 바자렐리로 하자는 순서를 결정했다. 부리와 바자렐리의 대상 공동수상. 덕분에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물론 한국의 이응노에게 명예상이 돌아갔다.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현대미술의 교과서이기도 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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