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대표 양문규 시인
“2010년 이후로는 천태산 은행나무에 바치는 시가 (문화재나 천연기념물 중) 가장 많을 겁니다. 모두 합치면 1천수를 훌쩍 넘을 겁니다. 하하.”
빈말이 아니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최근 펴낸 시모음집 <천태산 은행나무 읽는 법>엔 무려 352명이 참여했다.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공광규 등 참여 시인들 면면도 화려하다. 2010년 <시를 부르는 은행나무>를 펴내기 시작해 이번이 8번째 시모음집이다. 지난 21~22일엔 아홉번째 시제가 열렸다.
2008년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만들어 시제와 시모음집 발간을 이끌고 있는 양문규(57) 시인을 지난 19일 전화로 만났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영국사에 자리한 천태산 은행나무 아래에 지난 21일 지역주민과 문인 100여명이 모였다. 수령이 1300년에 이른다는 이 고목은 천연기념물 223호다. 높이가 31m, 가슴 높이 둘레가 11m나 된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원규 시인은 은행나무와의 첫 만남을 두고 “신비로운 수형과 거대한 풍모에 눌려 나도 모르게 합장부터 해야 했다”고 쓰기도 했다.
“2011년과 2012년엔 문화재청 생생사업 지원 대상에 뽑혀 풍요롭게 행사를 치렀어요. 최근 5년은 지원을 받지 않고 참가자들이 5만원씩 부담해 치르고 있죠.” ‘시제를 언제까지 할 것인지’ 물었다. “시제를 하면 마음의 위안을 얻지만 준비가 힘들어요. 그래서 매년 ‘올해만 하겠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 반대가 심해요. ‘함께 더 놀아야 한다’는 것이죠. 군에서도 계속하길 원하고요.”
시제의 시작은? “귀향해 천태산에 가보니 은행나무는 있는데 행사가 없어요. 누교리 이장님에게 이야기해 시작했죠. 처음엔 지역 주민 중심으로 했어요. 문인들은 절만 했지요.”
충북 영동 천태산 기슭 영국사에서
2009년부터 ‘은행나무’ 시제 지내고
8번째 시모음집도 펴내 “헌시 1천수” “인근 초등학교 시절 소풍 다니던 추억”
외환위기때 낙향…나무 근처에 칩거
“각박한 서울살이 씻어내주는 위안” 영동 학산면 조령에서 태어난 양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 이 은행나무 주변으로 소풍을 다녔다.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로 다니던 실천문학사가 부도를 맞고 귀향을 결심했을 때 그가 택한 거처도 바로 은행나무 주변이었다. “(은행나무가 있는) 영국사 뒷방에서 5년 이상 기거했죠. 거기서 시인 백석의 창작방법을 테마로 한 박사 논문도 썼어요.” 2008년엔 천태산 자락에 사찰 땅을 빌려 ‘여여산방’이란 이름의 ‘놀이터 겸 작업실’을 지어 재작년까지 머물렀다. 지금은 삼봉산 자락에 집을 지어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귀향한다고 하자 아내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다 반대했어요. 먹고살 것도 없고, 어차피 올라올 텐데 왜 내려가느냐는 것이죠.” “서울 생활이 답답하고 각박하고 싫증이 나”서 고향에 내려온 양 시인에게 은행나무는 큰 위안이었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무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중에서) 시인에게 은행나무 자랑을 청했다. “수령이 비슷한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견줘 키는 작지만 둘레는 더 넓어요. 나무 양옆으로 물이 흘러 영양 공급이 잘돼 체력도 좋죠. 품위가 있어요.” 가수 이동원씨가 시제에서 노래를 부른 뒤 “노란 은행잎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제 노래 인생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했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고향의 시학’이란 글에서 “시에서 고향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본래적인 생의 의미를 찾는 길”이라고 썼다. “고향은 한 개인이 태어나 자라고 늙어서 죽어 묻히는, 스스로가 자신이 주인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한 자아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고향을 따스하게 가꾸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런 인식은 그의 지난 삶과 겹친다. 초등과 중학 시절 고향을 떠나 대전의 학교에서 유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두번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초등 3학년 때 인삼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가 자식 공부를 위해 대전에 집을 사셨어요. 부모님이 올 때마다 울고불고 매달렸죠. 내려가겠다고요.” 2년 늦게 들어간 청주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잡지 <여학생> 기자 생활을 했으나 이도 1년 만에 마감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9년 신경림 시인이 불러 시작한 서울살이는 99년에 끝났다.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그는 서울에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장과 실천문학사 기획실장이란 직함을 얻었다. 89년 등단해 시인 이름도 얻었다. 이런 고향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따스한 시선과 연결된다. 그의 부친 양동문(81)씨는 지금도 인삼 농사를 짓는다. 은행나무 시제 때마다 100만원을 내놓는다. 부모가 지은 농사 소출은 아들네 식탁에 오르는 무상 식재료다. “아버지가 내년과 내후년 인삼 수확물을 제 몫으로 돌려놓으셨어요. 돈벌이가 많지 않은 아들을 위한 마음이죠.” 양 시인은 7년 전 펴낸 시집 <식량주의자>에서 쉴 때 쉬지도 못하고 지금도 자식들에게 뭔가를 내어주는 우리 세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따듯하게 그렸다. “아버지의 무서운 일독/ 어둠 깊으면/ 그 자리/ 봄빛 가득/ 살아오려는가”(‘아버지의 겨울’ 중에서) 그가 2006년 창간해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계간 문예지 <시에>의 사무실도 지난여름 서울에서 세종시로 옮겼단다. 서울 올 일이 더 줄어들었다. “‘시에’ 정기 구독자가 꽤 많아요. 매달 후원금이 300만원씩 들어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지난 21~22일 열린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에 참여한 양문규 시인. “대학을 다닐 때부터 동제나 당산제 등 민속에 관심이 많았어요. 80년대 중반에 신경림 시인의 민요기행에 많이 동행했어요. 그때 신 시인에게 ‘저도 같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사진 임동확 시인 제공
2009년부터 ‘은행나무’ 시제 지내고
8번째 시모음집도 펴내 “헌시 1천수” “인근 초등학교 시절 소풍 다니던 추억”
외환위기때 낙향…나무 근처에 칩거
“각박한 서울살이 씻어내주는 위안” 영동 학산면 조령에서 태어난 양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 이 은행나무 주변으로 소풍을 다녔다.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로 다니던 실천문학사가 부도를 맞고 귀향을 결심했을 때 그가 택한 거처도 바로 은행나무 주변이었다. “(은행나무가 있는) 영국사 뒷방에서 5년 이상 기거했죠. 거기서 시인 백석의 창작방법을 테마로 한 박사 논문도 썼어요.” 2008년엔 천태산 자락에 사찰 땅을 빌려 ‘여여산방’이란 이름의 ‘놀이터 겸 작업실’을 지어 재작년까지 머물렀다. 지금은 삼봉산 자락에 집을 지어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귀향한다고 하자 아내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다 반대했어요. 먹고살 것도 없고, 어차피 올라올 텐데 왜 내려가느냐는 것이죠.” “서울 생활이 답답하고 각박하고 싫증이 나”서 고향에 내려온 양 시인에게 은행나무는 큰 위안이었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무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중에서) 시인에게 은행나무 자랑을 청했다. “수령이 비슷한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견줘 키는 작지만 둘레는 더 넓어요. 나무 양옆으로 물이 흘러 영양 공급이 잘돼 체력도 좋죠. 품위가 있어요.” 가수 이동원씨가 시제에서 노래를 부른 뒤 “노란 은행잎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제 노래 인생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했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고향의 시학’이란 글에서 “시에서 고향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본래적인 생의 의미를 찾는 길”이라고 썼다. “고향은 한 개인이 태어나 자라고 늙어서 죽어 묻히는, 스스로가 자신이 주인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한 자아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고향을 따스하게 가꾸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런 인식은 그의 지난 삶과 겹친다. 초등과 중학 시절 고향을 떠나 대전의 학교에서 유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두번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초등 3학년 때 인삼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가 자식 공부를 위해 대전에 집을 사셨어요. 부모님이 올 때마다 울고불고 매달렸죠. 내려가겠다고요.” 2년 늦게 들어간 청주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잡지 <여학생> 기자 생활을 했으나 이도 1년 만에 마감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9년 신경림 시인이 불러 시작한 서울살이는 99년에 끝났다.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그는 서울에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장과 실천문학사 기획실장이란 직함을 얻었다. 89년 등단해 시인 이름도 얻었다. 이런 고향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따스한 시선과 연결된다. 그의 부친 양동문(81)씨는 지금도 인삼 농사를 짓는다. 은행나무 시제 때마다 100만원을 내놓는다. 부모가 지은 농사 소출은 아들네 식탁에 오르는 무상 식재료다. “아버지가 내년과 내후년 인삼 수확물을 제 몫으로 돌려놓으셨어요. 돈벌이가 많지 않은 아들을 위한 마음이죠.” 양 시인은 7년 전 펴낸 시집 <식량주의자>에서 쉴 때 쉬지도 못하고 지금도 자식들에게 뭔가를 내어주는 우리 세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따듯하게 그렸다. “아버지의 무서운 일독/ 어둠 깊으면/ 그 자리/ 봄빛 가득/ 살아오려는가”(‘아버지의 겨울’ 중에서) 그가 2006년 창간해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계간 문예지 <시에>의 사무실도 지난여름 서울에서 세종시로 옮겼단다. 서울 올 일이 더 줄어들었다. “‘시에’ 정기 구독자가 꽤 많아요. 매달 후원금이 300만원씩 들어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지난 21~22일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에 참가한 양문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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