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원작 소설을 애니메이션화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빨강머리 앤>에 등장하는 마릴라 커스버트 모습. 한국방송 제공
‘도대체 마릴라 커스버트가 누구야’라고 할 사람들을 위해 음성지원을 준비했다. “앤! 인제 그만 떠들고 네 방으로 가거라.” “매슈 오라버니는 저 아이의 버릇을 망치고 있어요.” 무늬 없는 원피스에 단정한 올림머리, 완고해 보이는 입가엔 자연스러운 팔자주름이 있고, 무표정해 보이는 눈매엔 따스함을 숨긴 키 큰 중년 여인. 그녀는 바로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그린 게이블스의 앤>의 등장인물 마릴라 아주머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아인 앤 셜리를 입양한 커스버트 남매는 둘 다 평생 독신이었다.
하긴 앤이라면 모를까, 누가 마릴라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그랬던 것이 최근 원작을 리메이크한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 2017년)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드라마는 마릴라의 캐릭터를 좀더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독신 여성으로서 여성의 교육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고 앤을 진보적 여성으로 기르려 노력하거나, 그녀의 젊은 시절 로맨스를 그린 것 등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마릴라는 주인공 앤을 제외하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변화하는 ‘입체적 인물’이다. 마릴라는 언제나 그들의 집인 초록 지붕(Green Gables) 집의 동쪽 창가에 앉았다. “모든 일을 진지하게 해나가는 그녀는 빛이 비치다 그늘이 지곤 하는 믿을 수 없는 햇빛에 대해 얼마쯤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햇빛의 변덕도 믿지 못하는 그녀가 앤이라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받아들여 모성애를 느끼는 과정은 어딘지 찡한 구석이 있다.
‘고전적 츤데레’인 마릴라는 앤을 내심 귀여워하면서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고 늘 노력한다. 그녀는 오빠 매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야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로 표현한다. “오, 앤, 난 늘 속에 있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 하지만 지금은 말하기가 쉽구나.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있고 네가 그린 게이블스에 온 이후로 넌 나의 기쁨이자 위안이었단다.” 좀더 젊었을 때 마릴라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다면, 독자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됐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녀는 나중에 앤의 남편이 되는 길버트의 아버지와 ‘썸’이 있었으나 사소한 말다툼으로 그대로 멀어지게 된다. 마릴라는 “블라이스 집안 사람들은 남에게 머리 숙이는 걸 싫어한다”는 말로 그들이 이후에도 결코 화해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릴라가 매슈의 동생이 아니라 누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 커스버트 남매의 모델이 되었던 작가 몽고메리의 친척, 맥닐 남매 또한 마거릿 맥닐이 남동생인 데이비드 맥닐보다 3살 연상이었다. 마릴라가 장녀였다면 그녀의 인생 많은 부분이 새롭게 읽힌다. 평생 초록 지붕 집을 지켰던 이유나 결혼을 하지 않은 점, 매슈와의 관계 등이 그렇다. 드라마 또한 마릴라를 장녀로 해석한 장면이 등장한다. 앤이 “결혼하고 싶었던 적이 있냐”고 묻자 마릴라는 금방 말을 잇지 못하며 “그런 적이 있었지.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집에 내가 있어야 했거든”이라고 답한다. 순간 늙은 외조부모를 위해 결혼을 미뤘던 원작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리고 너무 책임감 강하고 성실해 가정을 위해서라면 자기희생이 자연스러웠을 수많은 여성들의 얼굴이 마릴라에게 겹쳐졌다.
김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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