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열린 일본 정창원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신숙 한국전통문화대초빙교수가 정창원 소장 백제 유물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슬라이드로 비춰진 유물사진은 백제 의자왕이 선물했다고 추정되는 장식바둑돌의 모습이다.
“1300년전 이 보물창고가 생겼을 때 일본 왕실이 모은 수집품은 몇점인가요?”
“소장품 9000여점중 95%가 일본산, 5%만 한반도 등의 외국 것이라는데 무리한 해석 아닌가요?
“신라제 숟가락이 많은데, 당시 일본사람들이 직접 떠먹으려고 수입한 건가요?”
날선 질문들이 쏟아졌다. 질의가 집중된 일본 연구자는 내내 긴장된 표정이었다. 지난 7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국회 문화관광산업연구포럼(대표의원 손혜원)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주최로 열린 ‘정창원 소장 한반도 유물’ 국제심포지엄 현장은 참석한 학계 전문가들과 청중의 열기로 뜨거웠다.
심포지엄 주제인 정창원은 일본말로 ‘쇼소인’이라고 하는, 8세기 일 왕실 보물창고다. 옛 도읍이던 오사카 근처 나라에 자리잡은 거찰 도다이사 경내에 있다. 당대 일본 불교문화의 융성기(텐표 시대)를 이끈 쇼무 일왕이 756년 죽자 고묘 왕후가 왕실의 다양한 보물을 절에 바치면서 보관시설로 만들었다. 1300년 지난 지금도 무려 9000여 건의 미술공예품과 불교 고문서 등이 보존된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이름높다.
이 유서깊은 보물 창고를 놓고 한국에서 정치권까지 움직여 심포지엄을 마련한 건, 나름 답답한 사정이 있다. 국내에 없는 신라금(가야금), 백제 바둑판, 신라의 먹과 사발그릇·숟가락, 신라 촌락문서 등 삼국시대의 희귀 문화유산 상당수가 정창원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수십여년간 국내 학계가 가장 궁금해하는 유물들이었지만, 왕실 기관인 궁내청의 엄중한 통제로 유물공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46년 이래 매년 10월 국립나라박물관에서 한차례 열리는 소장품 전 외에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고, 구체적인 목록이나 소장정보도 온전하게 파악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일본 문화재당국과 학계는 지난 20여년간 정창원이 중국, 한반도를 경유한 실크로드 유물의 보고라는 성격을 집중 부각시키며, 나라가 실크로드의 종착지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해왔다. 상대적으로 고대 한반도와 연관된 소장 유물들을 독자적으로 재조명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셈이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심포지엄은 학계 연구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사이토 나카에 나라국립박물관 학예부장 등 일본 전문가들이 국내 미술사 문헌사 학자들과 역대 처음 한자리에서 난상토론을 벌였다. 두 나라 학계의 연구성과와 해석의 차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공동연구 공감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정창원 유물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일본의 정기 학술자료는 매년 나라박물관 전시 때 발간되는 연구도록과 궁내청에서 발간하는 <정창원 기요>라는 논문집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 중국, 서역계 문물과 일본 생산품 중심으로 접근하는 일본 학계의 시각들을 담아왔지만, 2000년대 이후엔 백제, 신라 유물과 비교하며 한반도 영향설을 실증하는 연구성과들이 조금씩 늘고있다. 이날 나이토 부장의 발표도 최근의 이런 흐름을 반영했다. 그는 정창원의 대표 소장품인 코발트빛 유리잔과 고대 수납장 가구(적칠문관목주자) 등에 대한 논고를 발표하면서 두 유물이 백제 장인 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았다. 유리잔의 경우 금속 다리받침의 역동적인 곡선과 어자(생선알)모양 문양이 2008년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석탑에서 발굴된 금동제사리기의 문양과 거의 일치하며, 수납장은 금속장식이 충남 부여 하황리 무덤에서 나온 은자루 유리공의 금속장식과 빼어닮은 점을 주목했다. 히가사 이쓰토 나라박물관 학예부 연구원도 정창원에 소장된 7~8세기 희귀 불경인 <화엄경론질>이 8세기초 신라사경을 일본에 가져온 신라계 고승 심상의 소지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화엄경론질>의 포장재에서 신라 촌락 문서가 발견된 사실을 중시해 심상이 <화엄경론질>을 가져왔다면 촌락문서의 연대도 학계 통설인 9세기가 아니라 윤선태 동국대 교수가 수년전 주장한 7세기 후반설을 더 유력하게 봐야한다는 견해를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
간간이 돌출된 두나라 연구자들의 민감한 시각차는 토론의 백미였다. 9000여점으로 알려진 정창원 소장품 가운데 백제, 신라, 중국 등 외국산 물품이 5%에 불과하다는 나이토 부장의 발표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10년전에는 6000점이라고 들었는데, 내놓는 수치가 달라져 확신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나이토는 이에 대해 “명확한 내역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한국 학계에서 관심을 갖고있는 쇼무천왕 당시 수집 보물은 전체의 90분의 1인 100건 정도다. 천조각, 문서쪽 등 개별 유물의 잣대를 어느 부분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소장품 추정수치가 달라질 수는 있다”고 반박했다.
정창원의 외국산 소장품 상당수가 중국·서역 계통이며, 신라가 중계무역을 통해 일본에 공급하는 구실을 주로 했다는 일본 학계의 기존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박남수 신라사학회 회장은 “정창원 소장 병풍의 배접지로 쓰였다가 발견된 신라 상인들의 물품 판매문서인 <매신라물해>를 보면, 신라가 제조한 물품 위주로 물목이 짜여져 있고, 여러 정황상 8~9세기에도 정창원에 신라 매입품이 상당수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고대 유리공예품 연구자인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은 “정창원 설립 당시 공예품, 생활용구 같은 왕실 수집품들 면면을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고급 보세창고와 거의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든다”며 “유리, 보석, 공예품 등의 성분을 분석해 국내 비슷한 출토품과 비교해보면 구체적인 생산지를 좀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견해를 내놨다.
1946년 나라국립박물관의 정창원 정기 전시가 시작된 이래 유물이 공개되어온 역사는 이미 70년을 넘겼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창원 유물에 대한 전문개설서는 1996년 나온 고 최재석 전 고대교수의 <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가 유일할 만큼 연구여건이 답보상태다. 일본 쪽 연구자들도 평상시엔 수장고에 일체 접근하지 못하기에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토론에 참가한 전문가들이 마지막에 결론처럼 입을 모은 것도 유물 정보의 공유와 한일 전문가들의 공동연구 추진에 대한 갈망이었다. 나이토 부장은 “지금 같은 (폐쇄적)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털어놨고, 최응천 동국대 교수도 연구를 위한 국가차원의 교섭 창구 일원화와 교류 전시 추진, 서적의 출판과 번역 지원 등의 연구 저변 확대를 제안했다.
유물 교환, 합동전시는 정창원을 성역시하는 일본 국민의 정서와 일 왕실 궁내청의 폐쇄성을 생각하면 쉽지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정창원이 더이상 ‘그림 속의 떡’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일본 정부 왕실과 외교적으로 교섭해 공동연구 차원에서라도 접근을 위한 활로를 뚫어야한다는 게 국내 학계의 바램이다. 양국 정치권, 정부당국의 각성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정창원 유물들에 대한 한일 연구협력은 근대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와 달리 역사적 걸림돌이 없다. 통일신라 왕조와 나라시대 일본이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공동의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며 밀접한 교류를 벌였던 7~8세기 동아시아 ‘1차 문화융성기’(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산들이기 때문이다. 쓰임새는 물론 문양, 모양새까지 한반도의 신라·백제 유물들과 거의 같은 백동가위, 청동정병, 향로, 유리잔 등의 소장품들이 이를 실증한다. 신라와 일본이 친교하며 문화적 번영을 함께 일궜던 옛 평화시대의 유산들을 미래의 자산으로 승화시킬 위정자들의 ‘밑돌놓기’가 절실해 보이는 시점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정창원의 대표 유물들 가운데 하나인 코발트빛 유리잔. 서역 페르시아계 유물이란 견해가 유력했으나, 최근 다리받침 등을 백제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일본의 옛 도읍 나라의 도다이사 경내에 있는 정창원 전경. 756년 건립된 일 왕실의 옛 보물창고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