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형유산원이 기획한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연작 20권.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여기, 스무명의 이름을 불러본다. 압제와 폭력의 시절, 뼛속까지 가난했던 시절, 재주를 재주로 대접해주지 않던 설움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 그 시간을 신명과 재능, 낙관으로 버텨온 사람들. 김금화(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1931~), 김병옥(양주소놀이굿·1931~2017), 김인(갓일·1820~2015), 김실자(강령탈춤·1928~2015), 김정순(강령탈춤·1932~), 김표영(배첩장·1925~2014), 노재영(양주별산대놀이·1932~2016), 박기하(강릉농악·1920~2017), 박용기(장도장·1931~2014), 박창규(은산별신제·1932~), 서한규(채상장·1930~2017), 이봉주(유기장·1926~), 이수여(망건장·1923~), 이양교(가사·1928~), 이영수(악기장·1929~2017), 이윤란(경기민요·1922~), 이은관(서도소리·1917~2014), 임석정(불화장·1924~2012), 조홍복(수영야류·1933~), 황영보(백동연죽장·1932~2018).
춤추고 노래하고 깎고 다듬고 그리면서 평생을 보낸 국가무형문화재 20명이다. 국립무형유산원이 기획하고 출판사 수류산방이 펴낸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시리즈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비매품으로 제작해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는 없지만 도서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는 공연·예술·전통기술·전통지식·의례·생활관습·놀이·무예 분야에서 137가지가 지정됐는데 이 중 몇몇은 계승할 사람이 없어 끊어졌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연구자들에게 의뢰해 2012~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49명의 구술을 받았고, 이 중 20명의 이야기를 책으로 정리했다. 수류산방의 심세중 실장은 “구술자들이 연세도 많으시고 지역 억양도 강해 기록자들이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고 연도·지명 등이 정확하지 않아 다시 확인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했다”며 “힘들었지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뿐 아니라 장인들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인 작업에 보람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장인들 중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저술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판을 펼쳐놔도 말수가 너무 적어 기록자들이 말문을 트기 위해 부단히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글이 아니라 말이기에 ‘신선도’가 뛰어나기도 하다. 스무명 구술 기록에선 최고의 예인이 되겠다는 강렬한 욕망,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성실함, 돈과 명예만 좇진 않겠다는 다짐, 후학을 길러내야 한다는 사명감 등이 스며 있다.
강령탈춤 전승자 김실자와 김정순(오른쪽). 수류산방 제공
■ “나는 최승희! 김최승희가 될 거예요!” 소녀 시절, 학교가 재미없었던 김정순은 어느날 서울 종로의 한 무용학원에 찾아가자 다짜고짜 당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한테 배우겠다고 했다. 건방지다며 아무한테나 배우라는 답이 돌아오자 “나는 김최승희가 되겠다”고 외쳤던 그는 결혼, 출산 뒤에도 춤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산과 인천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무용학원을 다니다 강령탈춤의 세계에 돌입했다. “강령탈춤을 잘하면 차별 대우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믿은 그는 “탈춤에 미쳤다”는 시동생의 힐난을 들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통은 학벌이 필요 없다. 이것만 열심히 잘하면 장관, 대통령 옆에도 앉을 수 있다. 이것을 얻기 위해 내 노력을 했다.”
노재영이 참여한 양주별산대놀이의 한 장면. 수류산방 제공
■ “양주별산대놀이는 그냥 춤이나 추는 게 아니에요” 양주별산대놀이는 조선시대 임금이 행차하면 춤추고 놀았던 서울 ‘딱딱이패’를 본떠 만들어졌다. 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노재영은 어려서부터 산대 춤을 흉내 내며 놀았다. “어렸을 땐 어쩌다 한번 산대 춤추는 거 구경하고 나면 젊은이들 끼리끼리 ‘덩떠 꿍따, 떵떠 꿍타’ 하는 것이 우리의 장난이었고 놀이였어요.”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폐허가 된 고향에 돌아온 그는 날품팔이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다. 그 와중에도 춤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양주별산대놀이에 담긴 ‘계급적 의미’를 강조했다. “상놈과 양반 사이에 격이 진 것을 욕을 해서 해소할 수 있게 맨든 연극이에요. 대사 한 끄트머리, 한 끄트머리가 전부 양반들에 대한 상놈의 가면에서 나온 거예요. 이걸 대한민국 사람이 알아야 해요.”
불화장 임석정이 경 읽는 모습. 수류산방 제공
■ “오늘 이 탱화를 하면 이걸 최고로 잘하고, 그다음에 또 무슨 탱화를 하면 그걸 최고로 잘하고…” 임석정은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 어머니와 당시 학덕 높은 용음 스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금강산 기슭 암자에서 생활한 그는 열세살에 아버지를 찾아 전라도 남원에까지 이르러 출가한다. “중에게 그림은 부업, 공부가 본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호남과 강원도 일대 절집을 오가면서 타고난 그림 재주를 갈고닦아 각종 불사에 참여한다. “장소와 보수를 차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만드는 게 원칙 중의 하나”라고 말했던 그는 1995년부터 전국 사찰의 불화를 모은 <한국의 불화> 연작을 펴내 12년 만에 40권을 집대성했다.
■ “매일 하지 않으면 손이 설어서 자기가 하는 일이라도 손이 익숙지 않습니다” 갓 쓰기 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머리띠, 망건은 이젠 전설 속 패션 아이템이 돼버렸다. 그러나 제주시 봉개동 망건청(마을 사람들이 모여 망건을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이수여에게 망건은 과거가 아니라 늘 ‘현재’의 삶이었다. 결혼하기 전엔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탕건(망건의 덮개)을 만들었고, 결혼해서 시작한 망건짜기는 4·3항쟁 때 남편을 잃고 나서도 계속됐다. 그는 말한다. “잔일(망건·탕건 짜는 일)은 꼼꼼한 거라서 마음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못 해. (…) 정성을 들여서 하고 있으면 그저 노력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이들이 불안하거나 그러면 이 일이 안 돼. 절대로 안 돼. 천천히 해야 돼.”
■ “말이 아니거든 대답을 하지 말고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마라. 나와 오래오래 하다 보면,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지” 부모님이 가르쳐준 건 “그저 땅 파는 일”밖에 없었지만, 박기하는 혼자 힘으로 글을 익히고, 독경을 하고, 꽹과리를 쳤다. 어린 시절 잦은 이사를 다닌 탓에 여러 마을의 농악을 접하면서 머리에 가락을 넣어뒀다가 치거나 직접 가락을 고안했다. 모든 걸 스스로 깨쳤다고 자부하는 그가 “죽은 사람도 살려놓은” 침술을 익힌 경위에 이르면 신묘한 분위기까지 일어나는데, 꿈에 나온 산신령의 계시에 따라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침통으로 환자를 보게 됐다는 내용이다. 강릉농악을 중흥시키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는 말년엔 동네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농악대를 꾸려 ‘여성농악 전성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전승자 김금화. 수류산방 제공
■ “무당은 됨됨이가 제일 중요합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이유로, 무당이라는 이유로, 김금화는 어릴 적부터 부모한테 구박받고 이웃들한테 핍박받으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겼다. 한이 깊은 만큼 꼭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한-미 수교 100주년을 맞아 열린 국제박람회에서 김금화는 온갖 냉대에도 불구하고 신명나는 굿 공연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정희 정권 때 ‘미신’으로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그는 틈틈이 종이쪼가리에 무가를 기록했고 나중에 이를 집대성했다. 앞으로 풍어제도 키우고 무속박물관도 만들고 싶다는 그는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옷도 행동도 품위있게 해라. 남의 덕을 빌어주려면 내가 먼저 덕이 있어야 해요.”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