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 촬영 현장에서 정해인, 손예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판석 피디(맨왼쪽). 제이티비시 제공.
최근 만난 배우 정해인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제이티비시·JTBC)를 촬영하면서 하루 평균 7~8시간 자고, 9시간 일했다고 말했다. “미니시리즈를 이렇게 푹 자면서 촬영한 건 처음”이라고 했다. 함께 출연한 손예진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인권이 있는 현장이었다”고 전했다.
드라마의 성공을 놓고 대부분 주연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지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건 이 대목이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 현장은 인권에 무심했다. 70분짜리를 1주일에 2회씩 만드는 살인적인 현장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연시해왔다. 특히 배우들보다 먼저 준비하고 늦게 일이 끝나는 스태프들은 겨우 2~3시간 눈을 붙이는 밤샘, 쪽잠은 기본이었다. 지난해엔 고 이한빛 씨제이이앤엠(CJ E&M) 피디가 “하루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는” 방송제작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현실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방영중인 드라마 <시크릿 마더>(에스비에스·SBS)도 스태프들이 찜질방에서 1~2시간 자고 출근하는 등 하루 20시간 이상 일한 사실이 최근 알려져 논란이 됐다. 대안으로 떠오른 사전제작은 시청자 반응을 반영해야 시청률이 높아진다는 이유 등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촬영을 일찍 시작해도 결국 시간에 쫓기게 되는 ‘습관’은 무서웠다. 한 드라마 피디는 “방영 시간 축소 등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한국 드라마에서 인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방송 노동자들의 인권도 지키고 시청률도 잘 나오는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최근 만난 안판석 피디는 “현장에서 불필요한 컷을 찍지 않는 게 첫번째 원칙이었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피디는 촬영할 때 필요한 컷 외에도 예비로 클로즈업·풀샷·바스트샷 등을 거듭해서 찍어둔다. 공들이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촬영은 배우와 스태프들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안판석 피디는 “드라마 촬영은 시를 쓰는 작업과 같다. 사전에 충분히 고민한 뒤 압축해서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정해인은 “2~3분 촬영한 게 드라마에 2~3분 나간 적이 있을 정도로 감독님이 사전에 그림을 다 그려왔다”고 말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쪽대본도 없었다. 손예진은 사전에 완성된 16부 시나리오를 모두 읽고 작품과 캐릭터 분석을 끝낸 뒤 촬영에 들어갔다. 덕분에 피디와 배우들은 완성된 대본으로 토론하면서 더 좋은 그림을 완성했다. 화제가 된 비행기 키스 장면이나, 마지막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 모습 등도 배우들이 작품에 빠져들어 저절로 만들어나간 장면들이다. 안판석 피디는 “현장에서 배우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드라마에 대한 토론만 했다”고 말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사례는 7월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앞두고 의미있게 다가온다. 한국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보여준 것처럼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면 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한국 드라마의 ‘빠듯한 현실’이 더는 인권 침해의 핑계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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