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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치욕의 역사를 끝내다

등록 2018-07-03 11:56수정 2018-07-03 19:27

[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29년 전인 1989년 7월3일
미륵사지서 처음 발견한 ‘백제 채색 벽화’ 조각 공개
1980년~1995년 발굴조사로 2만여 점 유물 수습
이후 일본이 훼손한 석탑 원형복원 논의로 이어져
올해 6월20일, 20년에 걸쳐 복원을 마친 석탑 공개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작은 파편이어서 전체 그림의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당초와 대나무 그림만큼은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오늘로부터 29년 전인 1989년 7월3일, 당시 문화공보부는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백제시대 채색 벽화’ 조각을 공개했다. 백제시대 채색 벽화 조각의 발견은 사찰의 흔적만 남은 미륵사지에서 발견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벽화 조각은 흙벽에 백회를 바르고 그린 것으로 대나무, 당초, 꽃과 불명확한 기하학무늬 등이 남아 있었다. 백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인근의 부여 부소산 사찰 터에서 출토한 벽화 조각과는 달리 새와 인물 모습은 보이지 않는 차이점이 있었다. 반면, 벽화 조각에 표현한 대나무는 고구려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호류지 다마무시즈지에 그려진 사신사호도의 대나무 그림과 유사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에서 백제 무왕 시대의 금동사리함, 명문과 함께 나와 눈길을 모았던 원형 청동합들은 백제 귀족층이 소유했던 고급 보석함으로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에서 백제 무왕 시대의 금동사리함, 명문과 함께 나와 눈길을 모았던 원형 청동합들은 백제 귀족층이 소유했던 고급 보석함으로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미륵사지 발굴조사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약 15여 년 동안 이어져 백제시대 채색 벽화 조각을 포함해 2만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로 인해 백제 및 그 이후 문화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울러 일본의 미륵사지 훼손에 대한 원형복원 논의로도 이어졌다. 이는 우리의 문화유산조차도 마음대로 조사하고 또 복원할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했다.

‘동양 최대 규모’ 미륵사의 창건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미륵사는 10만 평(33만㎡)에 이르는 너른 절터에 35년에 걸쳐 건설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는 조선 전기에 간행된 고려 후기 역사서인 일연의 <삼국유사> 2권 무왕조에 남아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제 30대 무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왕비 (선화공주 )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를 하였다 .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자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 그리하여 이곳에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 불렀다 .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미륵사는 백제시대에 이어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뤘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문인인 강후진의 <와유록>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더라” 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불타버린 것과 달리 미륵사는 다른 원인으로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공식 누리집 사진.
미륵사는 이후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석탑(국보 제11호)과 깃발대를 지지하는 기둥인 당간지주 2기 등의 흔적만 남았다. 동양 최대 규모 절터인 미륵사지는 백제문화의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삼국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여겨졌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본 학자들은 문화재 보전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미륵사지에 대한 날림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본은 미륵사가 ‘品’자 모양의 3개가 합쳐 만들어진 사찰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1980년 시작한 한국의 발굴 조사를 통해 일본이 주장한 ‘品’자 모양 사찰배치설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발굴을 통해 확인한 사찰 배치를 보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각 탑의 북쪽에는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다. 이런 배치는 동양 고대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없는 삼탑삼금당의 새로운 형태이다. 일본의 잘못된 조사로 인해 하마터면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묻힐 뻔 한 것이다.

일본에 의해 훼손된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일본에 의해 훼손된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일본에 의한 미륵사지의 수난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륵사지 석탑은 동탑과 서탑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서탑이 1915년 벼락에 맞아 그만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일본은 보수공사를 한다며 무려 185t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서탑에 들이부었다. 콘크리트는 탄산칼슘 등의 성분으로 인해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무지가 오히려 문화재를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덕지덕지 발라놓은 콘크리트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미륵사지 석탑을 그저 흉측한 몰골의 돌덩어리로 둔갑시켰다.

미륵사지 석탑 복원, 20년 걸린 이유

해체작업에 들어간 미륵사지석탑의 모습(남서쪽에서 바라봄).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해체작업에 들어간 미륵사지석탑의 모습(남서쪽에서 바라봄).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제공
1998년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해체 수리가 결정됐다. 1300년이 흐르면서 석탑은 노후됐고, 안전성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무리한 복원으로 미륵사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원래의 9층이 아닌 1915년 당시 무너진 6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재관리 미륵사지석탑 석탑 국보 복원 문화재 관리 해체 공사. <한겨레> 자료 사진.
문화재관리 미륵사지석탑 석탑 국보 복원 문화재 관리 해체 공사. <한겨레> 자료 사진.
문제는 일본이 덧발라놓은 콘크리트였다. 그 두께가 최대 4m에 달했고, 무게만 185t이었다. 복원팀은 치과 치석 제거용 기구로 콘크리트 가루 한알 한알을 세밀하게 벗겨냈다. 그렇게 석탑 복원에 걸린 시간만 20년이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수리 후 모습(동쪽 옆 모습). 사진 제공 <문화재청>
익산 미륵사지 석탑 수리 후 모습(동쪽 옆 모습). 사진 제공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6월20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 현장에서 설명회를 열고 최근 수리를 마친 석탑 모습을 공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기간 동안 체계적인 수리를 진행한 것”이라며 “특히 국제적 기준에 따라 학술조사와 해체·수리 과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에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81%에 달하는 부재를 재사용했으며, 부족한 부재는 재료의 유사성을 위해 인근의 황등 채석장 등에서 채취해 보강했다.

문화재청은 7월 중순 미륵사지 석탑을 주변 정비를 거쳐 임시 개방하고, 12월부터는 원래의 자리에서 재공개할 예정이다. 1300년을 버텨온 미륵사지 석탑은 이제 치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처음 세워진 모습 그대로 세상의 빛을 볼 준비를 마쳤다.

참고문헌

<미륵사 복원고증 연구 - 익산 미륵사 불교미술의 고증연구 > 국립문화재연구소 , 건축문화재연구실 , 덕성여자대학교 미술문화연구소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 >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벽화편 >

<미륵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 II>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전라부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 (숨겨진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 전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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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이경복 학예연구사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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