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씨가 24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정원에 피어난 범부채꽃 옆에 서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늘 햇볕에 목마른 독일인들과 30년을 보냈기 때문일까. 수은주가 36℃를 기록한 24일 오후, 그는 “더운 날씨를 즐기는 편”이라며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고정희(61). 그는 2006년 <독일정원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난 12년간 <신의 정원, 나의 천국>을 비롯해 <바로크 정원 이야기>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일곱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 등 정원을 주제로 11권의 책(공저·번역서 포함)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정원 이야기꾼’, ‘정원 커뮤니케이터’다. 베를린공대에서 20세기 조경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독일에서 조경·환경·문화교류 컨설팅회사인 ‘서드 스페이스’(Third Space)를 운영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도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다. 6년 만에 잠깐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학부시절엔 조경과 별 인연이 없었지만 198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조경 설계로 전공을 바꿨다. “어릴 적 서울 성북구 장위동의 뜰이 있는 집에서 자랐어요. ‘타고난 정원사’였던 어머니 덕분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에 둘러싸여 지냈는데 그래선지 제 마음 속엔 늘 ‘정원과 집’이라는 이상이 씨앗처럼 남아 있었나봐요.”
고정희씨가 24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날씨가 음울한 탓인지 독일인들은 정원 사랑이 지극하다. “한국의 도시인들도 텃밭 가꾸기 등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잖아요. 독일 사람들은 대부분 먹거리를 기르는 텃밭 옆에 정원을 함께 가꿔요. 숙박 금지 등 사용 규제가 엄격하지만 정원에 딸린 작은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즐기지요.” 19세기 말부터 대규모 정원박람회를 개최해온 독일은 통일 이후 동독의 도시개발에 정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정원박람회가 열리는 주요 장소에 커다란 공원을 만드는 것은 물론 도시 곳곳을 리모델링해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행사가 끝난 뒤 이런 정원들은 철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여행 명소로 자리잡는다. 이제까지 수천개의 정원을 방문했다는 그가 가장 매료된 인물은 독일의 조경가 칼 푀르스터(1874~1970)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기하학적인 정원을 거부하고 온갖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들어냈으며 ‘초봄-봄-초여름-한여름-가을-늦가을-겨울의 일곱 계절 동안 늘 (화초가) 피어있으며 늘 변화하는 정원’이란 개념을 고안했다. 자신이 가꾼 개인 공간을 시민들에게 기꺼이 개방하는 ‘정원 처방’을 즐겼으며, 걸출한 후배 조경가들을 길러냈다. “아름다움이 언젠간 세상에서 지옥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낮엔 숙근초를 재배하는 등 정원에서 일하고 밤엔 글쓰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푀르스터의 인생이야말로 고정희가 닮고 싶은 삶이라고 한다. 그는 독일 칼 푀르스터재단 부회장이기도 하다.
그가 애초 조경을 시작했던 동기처럼 “‘정원과 집’은 많은 사람들이 꿈꾸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이상향으로 만들려고 했던 푀르스터처럼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도 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원한다. 조경·건축 등 공간전문가들뿐 아니라 보다 많은 ‘교양 시민’들에게 정원에 대한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싶은 이유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처럼 유명한 곳뿐 아니라 먹거리를 디자인 모티브로 삼은 프랑스 루아르 지방의 빌랑드리 채소문양 정원, 스러져가는 식물들에서조차 아름다움을 발견한 조경가 피에트 아우돌프의 작품처럼 정원의 ‘통념’을 깨는 곳들로의 여행을 권합니다.” 물론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도 잊지 않았다. “한국 정원은 서양과 달리 고정적인 설계 양식·원칙을 고집하기보다는 그 공간 안에서 시를 읊고 노래하고 명상하는 퍼포먼스 정원입니다. 이런 전통이 ‘참여형 정원문화’로 이어지면 좋겠어요.”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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