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련 작 <에르블레 풍경>(1930), 종이에 유채, 24.2x33cm
“그림 또 찾았어요! ”
서울 안국동 사무실에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그림 취재원으로 잘 알고 지내던 민영순 할머니한테서 온 낭보였다. “집 뒷방에 묵혀뒀던 옛 짐 꾸러미 안을 풀어봤어요. 좀 작은 그림이 튀어나오데요. 임용련 선생의 그림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
때는 1982년 2월. 전화를 받은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 이구열은 흥분을 가누기 어려웠다.
임용련(1901~?)이라… 일제강점기 최고의 지성과 역량을 갖춘 유학파 화가로 꼽혔지만 그때까지 작품 한점 전해지지 않은 비운의 미술인. 1929년 미국 예일대 미술과를 수석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 연수여행을 왔다가 현지 유학중이던 여성화가 백남순(1904~1994)을 만나 결혼했다. 1930년 11월 귀국해 국내 최초 부부전시를 동아일보사에서 벌이며 화제를 모았고, 그 뒤 부인과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교육기관으로 유명했던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의 영어·미술 선생이 된다.
1930년 찍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모습. 20년 뒤 임용련은 전쟁중 실종됐고, 34년 뒤 백남순은 미국으로 떠난다.
두 부부는 소그림과 은지화로 널리 알려진 국민화가 이중섭과도 인연이 남달랐다. 30년대 초 이중섭의 오산학교 재학 시절 그의 민족적 정체성과 그림 재능을 일깨워준 스승이 그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임용련은 그때까지 남은 실물 작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해방 뒤 월남하면서 정주의 학교 관사에 대부분의 작품들을 두고 와 그 뒤 소재를 알 수 없게 됐다. 미 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뒤엔 미술과 동떨어진 세관장 등으로 일하다, 한국전쟁 당시 은신하던 집에서 북한 기관원에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반동으로 처형됐을 것이라는 억측들만 떠돌 뿐 작가로서의 존재가 사실상 지워졌고, 세간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구열은 앞서 7달 전 민성순 할머니의 이촌동 아파트 한 구석에서 임용련의 부인 백남순의 유일한 실물작품인 여덟폭 병풍 그림 <낙원>(1937년작)을 발견하고 <계간미술>을 통해 이 사실을 학계에 공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높이가 1m66cm에 길이가 3m를 훌쩍 넘는 이 대작은 양화와 전통화의 구도를 절충해 그린 작품이었다. 전통 산수를 배경으로 알몸의 인간군상과 양식 집, 이국적인 나무들이 흩어져 작가 나름대로 꿈꾼 이상향의 세계를 펼쳐놓은 그림이었다.
2000년 미국의 한 고미술가게에서 발견된 임용련의 연필화 <십자가>(개인소장). 십자가를 둘러싼 역동적인 인물군상들의 몸짓과 두팔을 치켜든 알몸 남자 등의 독특한 상징성이 눈길을 잡아끄는 수작이다. 1930년 부부 전람회 때 출품작중 일부였다는 사실이 80년대 백남순 작가에 대한 인터뷰(윤범모 평론가)를 통해 밝혀졌다.
사실 백남순은 1920년대 나혜석과 더불어 서구 미술계의 공기를 호흡한 몇 안 되는 당대 신여성화가였다. 서구 화단에 정식 과정을 밟아 유학한 여성작가는 그가 처음이었으니, 이런 여성미술 선구자의 유일한 실제 작품이 발견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백 작가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화업을 접은 뒤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남편 임용련처럼 당시 국내 화단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낙원>의 발견을 통해 한국 미술사에서 작가로서 재조명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민성순 할머니는 이민갔던 백남순 작가의 친한 후배였다.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 중림성당 아래 가명보통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일했는데, 한살 많은 백 작가를 친언니처럼 따르며 절친하게 지냈다. 민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서 꺼내준 <낙원>은 백남순 작가가 준 선물이었다. 의사와 결혼해 남편이 개업한 완도로 시집살이를 떠나게 되자, 백남순이 축하한다며 건넨 것이었다.
1930년 11월 서울 광화문통 동아일보사 사옥 옥상에서 열린 임용련 백남순 부부작가 전을 소개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
이구열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백남순의 묻혀있던 작품을 40여년 만에 기적적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곧장 남편 임용련의 전혀 몰랐던 작품이 연이어 나왔다니 꿈만 같았다. 1981년 한 여성지에 백남순의 <낙원>을 발견한 내력을 기고하면서 “앞으로 남편 임용련의 작품도 발견되기를 고대할 뿐”이라는 소망을 적기도 했다. 거짓말같이 그 소망이 곧장 이뤄지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곧장 민 할머니에게 가겠다고 말해놓고, <계간미술> 이종석 주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카메라를 들고나온 이 주간과 이촌동의 민 할머니 아파트로 달려갔다.
백남순이 1937년 그린 대작 <낙원>. 현재 남아 전하는 유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1981년 그의 후배 지인인 민영순의 집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1985년 호암미술관(현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이 됐다. 2012년 손상부위를 고치고 오염물을 걷는 수복과정을 거쳤다.
아파트에서 민 할머니가 내어 보여준 작품은 세로 24.2㎝, 가로 33㎝로 작은 6호짜리 유채그림. 화폭엔 소담하고 깔끔한 별장 같은 주택들 너머로 강이 흐르고 멀리 아스라히 숲과 저물녘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선명하면서도 세련된 채색, 사실적이면서도 간명하게 압축된 구도, 유려한 붓질 모든 것이 흠잡을 것 없을 정도로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이구열과 이종석이 그보다 주목한 건 그림 오른편 상단이었다. 작가 이름이 쓰여진 서명 부분이 보였다.
‘P.Yim.1930’.
1930년 그렸다는 임용련 사인이 확실했다. 그가 가명으로 썼던 ‘임파’의 영어약자 ‘P’가 또렷히 드러나 있었던 것. 사연이 있다. 임용련은 3·1운동 당시 배제고보에 재학하면서 항쟁에 참여했다가 일제 수배를 받자 중국으로 망명한다. 조선인이 많이 재학했던 난징의 진링대학(금릉대학)에 다니다 1921년 미국 유학을 떠나는데, 그때 여권에 중국사람 가명인 ‘임파(任波)’를 썼다. 영자명으로 ‘Phah Yim’이란 가명을 미국서 학교에 다닐 때도 썼고, 귀국한 뒤에도 아호로도 썼던 것이다. 임용련 작품을 확인한 이구열은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미국에 있는 부인 백남순에게 보냈다. 곧장 놀라운 답신이 날아왔다.
‘너무 큰 기쁨에…한참 전신이 떨렸습니다…이곳은 바로 우리가 결혼하고 살던 에르블레입니다. 파리에서 기차로 40분 걸리는 근교입니다. 센 강을 끼고 고요히 잠자는 듯한 아름다운 고옥소읍에 별장지가 된 곳입니다…이 그림은 우리가 살던 집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던 조망입니다.”
백남순의 서신 덕분에 작품의 숨은 내력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그림은 1930년 4월 파리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사랑에 빠져 결혼한 임용련 백남순 커플의 신혼집 주변 풍경이었다. 에르블레는 파리 서북쪽 센 강변 기슭에 자리한 마을. 19세기 말 인상파를 비롯한 현지 화가들이 종종 사생을 하러 나오던 풍광 좋은 곳이었다. 사랑에 빠진 임용련-백남순 부부는 1930년 4월 이 마을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치른 뒤 그림 속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셋집에서 신혼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은 그림은 프랑스의 행복한 신혼 시절 풍경에 대한 임용련의 소박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90년대~2000년대 정준모, 김복기 등의 후대 연구자들이 에르불레 지역을 답사한 결과 임용련이 본 30년대 그림 풍경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구열은 백남순의 동의를 얻어 이 그림을 <에르불레 풍경>으로 명명했다. 소장자인 민영순 할머니는 이 작품을 선물한 백남순에게 남편의 흔적이 남은 유품으로 돌려주고 싶어했지만, 백남순 작가가 한사코 고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뜻을 받아들여 82년 당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경성 관장과 이구열 소장이 입회한 가운데 민영순 할머니가 작품을 정식 기증하는 행사를 치렀고, 그뒤 미술관의 가장 소중한 근대기 희귀소장품 가운데 하나로 지금껏 간직되어 왔다. 이경성 관장은 “고분에서 금관을 발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림의 가치를 격찬했다.
흥미롭게도 <에르불레 풍경>은 그림 세부 여기저기서 임용련의 제자인 이중섭의 개성적인 그림 요소들이 마치 선대의 디엔에이(DNA)처럼 포착된다. 단적인 예가 그림 속 주택가 집 벽면이나 센 강의 수면, 건너편 무성한 숲 등에서 발견되는, 죽죽 긁어내린 선의 흔적들이다. 이는 풍경 속 경물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이중섭의 은지화와 유화 등에 나타나는 도드라진 특징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풍광을 압축해 옮긴 윤곽선의 필력도 이중섭 그림에서 곧잘 보이는 요소다. ‘밑그림을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이 하라’고 이르며 제자 이중섭에게 가르쳐준 임용련 특유의 스타일이 단박에 확인되는 작품인 셈이다.
<에르불레…>는 지난세기 전반기 유럽과 한반도의 여러 지역을 이동했다.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그려져 조선땅으로 왔고, 조선 땅도 경성에서 평안도 정주로 갔다가 전라도 완도의 민 할머니 시갓집으로 갔고, 그 뒤 민 할머니 일가가 이사한 목포로 갔다가, 그의 노후에 다시 서울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촌동 아파트 뒷방 장롱속에 묻혀있다 50여년만에 드러나기에 이른다. 이 곡절많은 그림은 서울이나 이북에 있지않고 남도의 섬에 묻혀있던 덕분에 전쟁의 파괴를 면했다. 그리고 또 수십여년 잊혀졌다가, 81~82년 임용련의 유작을 수소문하는 이구열의 글이 잡지에 실린 것을 민 할머니가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미술사에 다시 등장하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임용련이 그린 금강산 그림. 미술사가 이태호씨는 이 그림이 만물상 절부암을 그린 것이며 유화로 그린 본격적인 금강산 사생화의 효시라고 지목했다. 1984년 ‘한국현대미술 100년’전과 1999년 ‘몽유금강’ 전에서 선보인 바 있는 작품이다.
1982년 <에르불레 풍경>의 발견을 계기로 임용련의 구작들은 잇따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다. 이구열 소장은 84년 금성출판사의 <한국 회화선집> 간행과정에서 임용련이 오산고보 교사시절 같은 음악교사였던 김세형의 결혼식에 선물로 건네어준 소품그림 <금강산>을 추가 확인해 도판에 실었다. 이 작품은 84년 윤범모 평론가가 기획한 ‘한국현대미술10년’전’에 출품되어 처음 대중 앞에 선보였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0년에는 재미수집가 이충렬씨가 미국의 한 고미술점에서 임용련이 예일대 졸업 전 그린 성화의 밑그림 연필화 <십자가>를 발견(현재는 개인소장)하기도 했다. 이 두 그림 모두 묘사력이나 상징성, 도상 등에서 임용련의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영영 못찾을 것 같던 임용련의 작품 3점이 80년대 <에르불레 풍경>을 시작으로 잇따라 드러난 것은 국내 미술사학계에 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에르불레…>와 <십자가>는 1930년 부부귀국전의 출품작 80여점 가운데 일부다. 따라서 앞으로도 30년 전시의 출품작이 어딘가에서 추가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백남순도 81년 자신의 유일한 현존작 <낙원>이 후배 민영순의 아파트에서 발견돼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 자신 또한 미국에서 노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노년기 작품들은 9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원로회화작가전에 80년대 그린 <한알의 밀알><영광>이 출품된 뒤 기증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자칫 영영 묻힐뻔했던 선구적인 여성화가 백남순은 말년 국내 작품전까지 출품하는 소원을 이루며 1994년 90살로 눈을 감았다.
임용련·백남순 부분의 삶과 작품을 망각 속에 밀어넣은 건 분단과 전쟁이었다. 야수파와 인상주의의 세련된 감각이 엿보이는 <에르불레 풍경>은 그 애잔한 사연을 함축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15년과 20년이 흐른 뒤 임용련에게 닥친 해방, 분단, 전쟁의 불행과 비극적인 말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구열 소장은 “일본 유학파 화가들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던 세련된 색채와 화면 구성, 탁월한 필력을 생각할 때 전란을 겪지 않았더라면, 임용련은 이 나라 화단의 대가가 되어 큰 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며 안타까와했다.
<에르불레 풍경>은 두 남녀작가의 신혼시절 이국의 기억을 옮긴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의 내력을 좇다보면, 분단과 이념의 역사에 묻혀버린 부부작가의 비극적 삶과 함께,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명작을 남겼지만 전후 가난과 이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숨진 제자의 후일담까지 딸려나오게 되는, 참으로 기구한 인간사의 이야기들을 가득 품은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