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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배고픈 시절 전국민을 위로했던 대배우, 신성일의 못다한 이야기들

등록 2018-11-04 17:48수정 2018-11-05 09:14

지승호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신성일이 고백한 어린 시절과 데뷔, 성공에 이르기까지

모범생이었던 고2때 집안 풍비박산 나며 방황
가수로 성공한 동창 친구 보면서 배우 결심
신상옥 감독과 데뷔, 유현목 감독 작품으로 스타
하길종 등이 준 최악의 배우상 “내 인생 최고의 상”

”무비스타로 불리는 것이 나는 좋아요. 무비스타가 없으면 영화를 보는 매력이 없잖아요. 영화배우는 매력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거리를 떠도는 거친 남자와 부잣집 딸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이 크게 흥행하며 대한민국 첫번째 ‘무비스타’로 불렸던 신성일은 생전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알마)에서 이렇게 말했다. 81살의 나이로 4일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은 무려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대한민국 영화사의 황금기를 관통한 스타배우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함께 작업한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에 털어놓은 그의 성장과 데뷔, 충무로에서의 성공기를 정리했다.

10월 4일 새벽 향년 81로 세상을 떠난 대한민국 영화계의 큰 별 배우 신성일. 사진공동취재단
10월 4일 새벽 향년 81로 세상을 떠난 대한민국 영화계의 큰 별 배우 신성일. 사진공동취재단

“‘너는 남보다 잘생겼네’. 학교 다닐 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으니까 그것이 대단한 자존심이랄까, 어떤 자신감이랄까, 자긍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나는 이걸 믿는데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너, 이 새끼 나쁜 놈’ 하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놈이 됩니다. ”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당시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던 고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는 그는 국민학교 시절 외할머니가 구멍난 양말을 기워주면 학교에서 가서 벗고 맨발로 버틸 정도로 고집 센 아이였다고 고백했다. 자존심 세고 모범생이었던 신성일은 명문 경북중, 경북고에 입학하면서 서울대학교 입학을 꿈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의대나 공대 진학을 준비하던 그는 배우를 꿈꿔본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따라 대구 송죽극장 자유극장 등 주로 프랑스 예술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을 다니면서 예술작품에 눈을 뜨게 된다.

“‘학생입장가’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숨어 들어가서 봤어요. 그때 본 영화들이 영화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또 어머니가 일요일에 내 손을 잡고 가끔 영화관에 데리고 갔어요. 그때 이미 영화에 몸을 던지게 될 운명적인 인연이 깃들지 않았나 싶어요. 영화를 보면서 내가 ‘영화인이 되어야겠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거죠. 그때 프랑스 영화, 예를 들어 <인생유전>을 비롯한 프랑스 최고의 작품들을 다 거기서 감상했어요.”

배우 신성일 신필림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영화 데뷔를 한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1960). 한겨레 자료사진
배우 신성일 신필림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영화 데뷔를 한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1960). 한겨레 자료사진
그랬던 그가 영화와 진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 건 고2때 그의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 벌어지면서였다. 직장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회생활을 했던 어머니가 주도하던 계모임이 깨진 것이다. 당시 <영남일보> 사회면에 ‘과부 산통 계주, 야반도주’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올 정도로 떠들썩했던 사건으로 그의 집에는 빚쟁이들이 몰려들었고, 물정 모르던 그는 빚쟁이들한테 ‘엄마 찾아내라’며 빌길질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서울대학교 입학의 꿈도 날아갔다. 대학입시의 꿈은 물거품됐지만 대신 웬만한 시련은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이 생겨났다.

“어떤 일이든지 뚫고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길러진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서울 올라와서도 대학 떨어지고, 방황하고 좀 헤매기도 하다가 호떡 장사까지 하게 됐는데요. 호떡 장사한 소리를 생전에 어머니한테 하면 ‘창피하니까 그 얘기는 하지 마라’ 그러셨어요. 나는 호떡 장사가 사회 활동이라면 활동이라고 봅니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잘났고, 좋은 학교 다니면서 잘났네, 잘났다 하던 놈이, 서울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했던 경험, 그것이 자산이랄까 힘이 됐다고 생각해요. 주위 눈치 보지 않고 나를 키워나갈 수 있었던 힘 말입니다. ”

서울에 올라와 호떡장사까지 하면서 돈을 모으며 준비한 대학입시에 연거푸 떨어지면서 방황에 빠졌다. 이런 그를 배우의 길을 안내한 건 엉뚱하게도 성공한 동창 친구의 ‘외면’이었다.

“그날도 ‘무언가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품고 충무로를 걸어가는데, 손시향이라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 <검은 장갑>을 부른 친구를 만났어요. 손시향은 학교 동기였는데, 이 친구도 진짜 공부를 잘했어요. 그런데 내 경우랑 똑같이 어머니가 계를 하다 사고를 냈는데 세무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자살하셨어요. 그래도 손시향은 서울대학교 농대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가수를 한거죠. (…) 멀리서 오는데 굉장히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인사를 했죠.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이 친구가 “오랜만이야” 하고 어깨를 툭 치고 그냥 지나가버리더군요. 굉장히 섭섭했죠. 가수 됐다고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초라한 삼수생이었으니까 낙오자 아닙니까. 그 뒷모습을 보며서 생각했어요. ‘너는 노래 잘불러서 가수가 되어 출세했구나. 그래. 나는 노래는 못하니까 다른 걸로 성공하겠다’ 마음속으로 그랬죠. (…) 나를 확 바꿔버린 사건이었죠.”

배우 신성일의 첫주연작으로 큰 성공을 안겨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 한겨레 자료사진
배우 신성일의 첫주연작으로 큰 성공을 안겨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던 충무로1가의 중부경찰서 앞 골목에서 발견한 ‘한국배우전문학원’ 간판이 그의 눈에 쏙 들어왔다. 거기에 무작정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여기서 공부할 수 있읍니까”했더니 “우리는 이미 학생들을 다 뽑았기 때문에 후반기, 6월 이후에나 공부할 수 있어요”하는 겁니다. 실망해서 되돌아 나오는데, 저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젊은이, 젊은이” 하고 불러요. 그러면서 “젊은이, 이 학원에서 공부하고 싶나?”해요. ‘하고 싶다’고 했죠. 그러면 내일부터 나오라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김인걸 원장이었어요. (…) 1957년 4월이었죠.”

아직 대학에 영화과가 없던 시절 그는 학원에서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감독, 연극계의 이진순, 박진 같은 실력자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연극 공부를 하고 갓 돌아와 강의를 하던 고 양광남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부터 배웠던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 교과서는 이후에도 평생을 간직할 정도로 큰 깨달음을 준 책이었다.

공부를 하던 그는 신필림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신필림은 홍성기 감독, 배우 김지미가 주축이 된 선민영화사와 한국 영화계의 두 축이었는데 신필림이 배우모집 공고를 내자 무려 2640명이 여기에 지원을 했다. 그런데 그는 ”모집에서 떨어지면 일단 창피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 공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모집하는 날 구경은 하고 싶어 지금의 조선일보사 뒷골목에 있던 신필림 주변의 인산인해에 끼어있는데 한 구두닦이 아이가 그를 불렀다.

신성일과 엄앵란을 한국 최초의 ‘청춘 스타’로 빛나게 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 한겨레 자료사진
신성일과 엄앵란을 한국 최초의 ‘청춘 스타’로 빛나게 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 한겨레 자료사진
“누가 부른다고 해요. 서울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때예요. 수원 형네 집에서 서울 학원으로 열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할때 인데, 형이 비행기 조종사니까 생활이 괜찮아서 좋은 옷을 입고 다녔어요.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몸도 좋았거든. 거기 취미다방이라고 있었는데, (…)가보니 구석에서 바짝 마른 사람이 나를 불러요. 그분이 이형표 감독이었어요. 나중에 감독이 됐는데, 신상옥 감독하고 굉장히 가까운 분이십니다. (…)그분이 “신필름에 볼 일이 있어서 왔냐? 원서 접수는 했느냐?”고 해요. 그래서 “못했습니다”했더니 “하고 싶어서 왔느냐?”고 또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알았다며 쪽지에다 사인을 해주면서 “신상옥 감독 얼굴을 아느냐?”고 해요. ‘모른다’고 했더니 “최은희 여사는 아느냐?’고 하더라고. (…) (통제하는 신필림 직원에게 쪽지를 보이고 들어갔더니) 신상옥 감독, 최은희 여사가 있고, 그 옆에 사장 박운상 씨가 계시더군요. 신상옥 감독이 나를 위아래로 보더니 “야, 너 나하고 3년간 고생할래?” 했어요. ”

그날로 그는 신필림과 5년 계약을 했다. 그때 신상옥 감독이 ‘강신영’이었던 그에게 ‘신성일’, 풀어 말하면 ‘뉴(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당시 유한양행 과장의 급여 수준이었던 월급 5만환을 받으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서 막내 아들로 데뷔하기까지 그는 매일 사무실에 나가 전화를 받고,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심부름을 하며 충무로를 배워나갔다.

“신상옥 감독의 전화를 받으면서 영화계의 저명인사, 감독, 신 감독 주변의 영화 관계자, 청와대 관계자 등등, 이런 사람들에게 전화상으로 내 이름을 익혀준 것이 나중에 영화배우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신필림 생활 5년 동안 빈둥빈둥 논 것 같지만, 내가 영화계의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필요한 인맥과 실무 경험을 얻은, 참으로 알찬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작 그를 스타로 띄운건 신상옥 감독의 라이벌이었던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었다. 5년간 세 작품을 찍으며 별 빛을 보지 못한 그는 신필림과 재계약을 이루지 못했다. 붕뜬 상태로 눈치를 보던 그에게 연상의 여성과 연하의 남성간 로맨스인 <아낌없이 주련다>(1962)를 기획했던 호현찬이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신 감독의 아내이자 대배우였던 최은희를 비롯해 여러 신필림 사람들에게 캐스팅 제의에 대해 상의를 하다가 배은망덕하다며 “귀싸대기”까지 맞으면서 결별을 했고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으로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김수용 감독과 작업한 신성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개>(1967). 한겨레 자료사진
김수용 감독과 작업한 신성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개>(1967). 한겨레 자료사진
이후 배우 신성일은 <맨발의 청춘>으로 명실상부한 충무로의 대표배우로 거듭났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고,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엔 <흑맥> 등 34편, 1966년엔 <초우> 등 46편에 출연했고 67년엔 무려 <안개> 등 51편에 출연했다.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어려웠지만 극장에는 관객이 넘쳐나고 열악한 촬영환경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200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지던 이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신성일은 어떻게 기억할까.

“특수한 상황이어었던 건 확실해요. 해방, 전쟁, 4·19, 5·16을 겪으면서 1960년대부터 잘살기 운동을 시작하는데, 사람들에게 뭔가 위로가 될만한 거리가 전혀 없었어요. 극장이 냉난방도 되지 않고, 화장실 악취도 심하고, 찢어지지 않은 의자가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에, 화면은 비가 오듯이 줄이 갔는데도, 그래도 사람들이 위로를 받자면 극장 밖에 없었습니다. 매스컴이라야 라디오뿐이고, 사람들이 모여서 다닐 만한 데도 변변찮을 때니, 극장 시설이 형편 없어도 오로지 영화 보는게 최고였죠. 또 엄앵란, 김진규 그때 당시에 배우들이 다 잘생겼잖아요. 요즘처럼 인형같이 만들어진 얼굴들이 아니잖아요. 1960년대 우리 선배들을 보면 다 잘났다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국민들이 위로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4일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이 지난 10월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손가락 하트''를 만들며 입장하는 모습. 연합뉴스
4일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이 지난 10월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손가락 하트''를 만들며 입장하는 모습. 연합뉴스
1963년 청룡영화상이 제정된 이후 10년동안 인기상을 독차지할 정도로 사랑받은 배우이지만 엉뚱하게도 그는 당시 대학생들로부터 받은 ‘최악의 배우상’ 상패를 죽을 때까지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1967년 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하길종, 김승옥, 김지하가 주도해서 뽑은 최악의 한국영화에 그가 ‘최악의 배우상’에 선정된 것이다. 무려 그는 그 상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촬영 중간에 직접 받으러 가기도 했다.

“기분 나빠서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지승호)

“아냐, 그렇지 않아. 골든 라즈베리상이라고 최악의 영화를 선정해서 수상하잖아요. 하길종이 미국 가기 전에 그런 자료를 찾았나봐요. 그래서 김진규씨인가 최무룡씨한테는 ‘최고의 배우상’을 주고, 나는 ‘지나친 다작에 다른 사람이 해야 될 작품을 다 빼앗아 갔으니 최악의 배우다’라는 부제를 달아서 특별상을 주겠다고 오라고 해서 가서 받았지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상 가운데 제일 값진 상입니다. 그 친구들이 미학적인 감각이 있으니까요. 나한테 준 게 뭐냐면 흙으로 빚은 탈인데, 탈을 나무판에 투박스럽게 딱 붙여놓은 겁니다.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한테는 받은 상 가운데 제일 귀한 상입니다. 그래서 잘 보관하고 있어요.”

이후 <속 별들의 고향>(1976)에서 다시 만난 하길종 감독은 충분히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제 하늘 나라에서 하길종 감독과 재회하게 된 배우 신성일의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심을 보여주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화보]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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