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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사루비아다방 터줏대감’ 이관훈 “보이지 않는 미래, 그게 동력”

등록 2019-01-03 05:00

1999년 창립 때부터 줄곧 큐레이팅
‘미술정치’ 멀리하고 “20년 한길” 기획
대형숍·공사판 등 파격공간 연출
기획전시 107건…협업작가 134명
5년전 폐관위기 회원제로 살려내

“작가 기운과 상상력으로 꽃피워”
작가 85명·큐레이터 8명·관객 35명 참여
20돌 돌아보는 속편 ‘프리퀄’ 전시
20년 동안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을 이끌어온 이관훈 큐레이터. 노형석 기자
20년 동안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을 이끌어온 이관훈 큐레이터. 노형석 기자
미술판에서는 그를 ‘싸루비아의 터줏대감’이라고 부른다.

비영리 대안공간인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의 대표 큐레이터 이관훈(56)씨. 지난달 12일부터 서울 서촌 창성동 전시장에서 창립 20돌 전시을 차린 이씨는 99년부터 새해까지 21년째 사루비아의 전시를 동료 황신원씨와 같이 만들어왔다. 국내 민간전시기관에서 2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킨 유일한 현역 전문기획자인 그를 지난달 24일 전시장서 만났다. 이씨는 “이젠 솔직히 지쳤고 나이에 따른 감각의 한계도 느낀다”면서 사루비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 등을 털어놨다.

“원래 일하던 동아갤러리가 폐관된 뒤인 1999년 1월 작가 윤동구 선생 제안을 받고 창립 준비에 참여했지요. ‘작가 중심’ ‘작가 지원’을 내세운 새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했어요. 어릴 적 자란 부산 우암동 골목길에서 자유분방하게 놀았던 그 기분을 전시에 살려보고 싶었어요. 윤 선생과 유명분 화랑주 등 여러 미술인들이 힘을 모아 인사동 골목의 옛 지하다방 ‘사루비아’ 공간을 확보했고, 내부를 개조해 그해 10월 창립한 거죠. 2011년 창성동으로 옮겼지만 미술정치에 한눈 팔지 않고, 내부기획에만 전념해왔습니다. 이제 21년째 새해를 맞는데, 덤덤하면서도 세월의 무게감, 책임감 같은 게 절로 느껴져 옵니다.”

1999년 사루비아다방 개관전의 초대 작가 함진. <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사루비아다방 개관전의 초대 작가 함진.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1~2년 혹은 수개월만에 자리와 소속이 바뀌는 요즘 국내 기획자들의 생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뚝심있게 걸어갔다. 기획 공모로 선정한 작가와 머리를 맞대고 사루비아 공간 전체를 전시 때마다 신작처럼 새롭게 재구성하는 공간창작형 기획전을 지속했다. 운영위원제에서 회원제로의 성격 변화, 전시장 이전 등 부침이 있었지만, 공모전을 중심으로 107건의 기획전시를 치르며 연극무대과 대형숍, 공사판, 영상극장 등의 공간을 오고가는 숱한 파격적 연출과 작품 형식의 개척을 꾀한 점은 우리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어야 할 발자취라 할 수 있다.

“문화예술의 꽃은 기획자가 아닌 작가이며, 전시와 미술의 역사 또한 세대를 달리하며 뿜어내는 작가의 기운과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작가와 공간을 20년간 계속 바꾸면서 신진대사를 유지했고, 그것이 20년 넘게 기획자가 사루비아와 일체가 되어 공간을 지탱하고 키운 비결이 됐다고 그는 떠올렸다. 인사동 시절 콘크리트 벽체의 이미지로 가득했던 초창기 공간부터 전시벽의 색깔 크기까지 바꿀 수 있는 현재 창성동 공간까지 전시 때마다 작가들 개성에 따라 사루비아 공간 안팎이 확 바뀌는 파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관훈 기획자와 협업하며 거쳐간 작가들만 134명. 개관전 작가 함진씨를 비롯해 김을, 박기원, 배종헌, 오인환, 안두진, 손동현, 노충현씨 등 상당수 작가들이 전시 이후 화랑과 미술관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스타급 작가가 됐다. 99년 10~11월 열린 함진 작가의 개관전 ‘공상일기’는 그해 미술계의 주요 사건으로 거론될 만큼 울림이 컸다. 그룹전 경력밖에 없던당시 경원대(현 가천대) 미대생 함진은 고무찰흙과 종이, 멸치 등으로 만든 엽기적인 미니어처 조각들을 내놓아 미술계 안팎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미술인들은 최대한 늦춰 잡아도 사루비아가 5년 이상 못갈 걸로 예측했어요. 재원이 변변찮고 수익도 없기 때문이었죠. 저도 20년 붙박이로 일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지요.”

1970년대 복서 홍수환의 세계타이틀 경기 장면과 열광하는 다방 손님들의 그림자를 투사한 김창겸 작가의 <사루비아다방 III>(2003). <한겨레> 자료사진.
1970년대 복서 홍수환의 세계타이틀 경기 장면과 열광하는 다방 손님들의 그림자를 투사한 김창겸 작가의 <사루비아다방 III>(2003). <한겨레> 자료사진.
사루비아는 여러차례 재정적 위기를 겪었다. 2013년 하반기에는 운영위원들이 다음해 폐관을 논의할 정도로 상황이 암담했다. 하지만, 이관훈·황신원 기획자가 미술인들에게 후원회원 가입을 통해 사루비아의 재생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편지를 일일이 보내면서 50명 넘는 회원이 확보됐고, 큐레이터 중심의 회원제 사단법인 공간으로 기반을 닦았다. “사루비아는 이제 200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들의 산실이자 성장의 동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무엇보다 창립 때의 기획방향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긍지를 느낍니다. 지금은 기간이 다소 줄었지만 초창기엔 1달 준비, 1달 전시의 원칙 아래 작가들과 살다시피하면서 함께 공간과 작품을 고민했어요. 이미지를 재생하고 반복하면서 항상 생산하는 작가들과 공유하는 일상이 제 삶의 핵심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20년 동안 열악한 상황을 견디며 기획자로서 지탱할 수 있었다고 봐요. 함께 동고동락하며 좋은 기운, 건강한 기운을 제게 불어넣어준 작가들의 열정과 공력 덕분이죠.”

사루비아 20주년 기념전 ‘프리퀄 1999-2018’의 전시장 모습. 작가, 기획자, 관객에게 던진 전시, 작업에 대한 질문과 답변 내용들을 차트를 들추거나 원통형 롤 모양의 조형물을 돌리면서 살펴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사루비아 20주년 기념전 ‘프리퀄 1999-2018’의 전시장 모습. 작가, 기획자, 관객에게 던진 전시, 작업에 대한 질문과 답변 내용들을 차트를 들추거나 원통형 롤 모양의 조형물을 돌리면서 살펴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12일 개막한 사루비아 20주년 기념전 ‘프리퀄(PREQUEL) 1999-2018’(11일까지)도 이런 전통에 걸맞는 색다른 틀거지로 준비했다. 프리퀄이란 원래 원작 영화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속편. 사루비아에서 전시했던 이들을 포함한 작가들과 사루비아 큐레이터, 관객들이 참여해 각자 자신들의 20년 삶을 돌아보며 갖는 생각들을 설문해 답변 자료를 받은 뒤 이를 토대로 전시를 연출한 얼개. 흔한 유명작가, 명품 중심의 개관 잔치가 아니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큐레이터는 “작가와 기획자가 작품과 공간을 매개로 나눈 생각의 결과가 전시라고 한다면, 프리퀄 전은 그런 전시를 준비하면서 선행된 수많은 과정, 안에서 목격한 다양한 관점과 태도, 고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있다”고 했다. 그래서 역대 사루비아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 85명과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8명, 미술인 관람객 35명에게 물은 창작, 전시, 작품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이관훈, 황신원, 황정인, 문소영, 이누리씨 등 사루비아 학예팀이 정리해 콘텐츠를 꾸렸다. 기념전 형식 역시 사루비아에서 전시를 했던 박재영 차지연씨가 만들었는데, 네모진 대형 차트와 빛나는 원통형 ‘롤‘(감개), 원형의 탁상 비닐판 같은 독특한 조형물 안에 콘텐츠를 담았다. 원통형 롤에 적힌 작가의 조언 항목을 손잡이를 돌려가며 살펴보니 ‘한발 한발 천천히 걷기 지치지 않기…’‘결핍과 빈곤이 나의 힘…아무리 예술이 중요해도 삶보다 우위일 수는 없다는 신념’‘단점은 보완이 되지 않는다. 다만, 가끔은 매력적일 수 있다’ 는 등의 인상적인 답변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는 전시와 작업에 대한 사루비아 작가, 관객, 기획자들의 고민과 생각들을 덩어리 형식에 담아 성찰하며 볼 수 있게끔 해놓았다. 앞서 이관훈 기획자는 다른 학예팀 기획자들과 지난해 내내 공들여서 20년간 벌어진 107차례의 전시 주요 장면과 기획자의 노트 등을 간추려 엮은 회고 이미지북 <프리퀄Ⅰ:보기 1999-2018>을 출간했고, 전시장에서 펼쳐진 설문과 답변은 텍스트북 <프리퀄 Ⅱ:듣기 1999-2018>은 편집되는대로 2월중 출간할 예정이다. 이 기획자의 새해 제일 큰 소망은 뜻밖에도 ‘미세먼지 척결’이었다. 작가와 전시장서 작업하고 이야기할 때 편안하게 숨쉬면서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간절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한 뒤 사루비아의 미래에 대한 구상이 자연스레 이어졌다.“사루비아의 미래는 열려 있지만 보이지 않죠. 항상 이정표를 새로 만들어가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사루비아를 끌어온 또다른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작가와 작품을 위해 양분과 거름을 주고 마당을 깔아주는 게 제 역할이고 그 역할을 다할 때까지 뭔가 만들고 꾸리는 태도와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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