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정이현
나는 교실 한 가운데 앉아있다. 사방은 정적에 싸여있다. 사각거리는 연필심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똑같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상 위에 눈을 박고 있다. 내가 대한민국 고3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설명할 길 없는 공포가 심장을 짓누른다. 십오 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가끔 그 시절의 꿈을 꾼다.
요즘 영화배우 문근영 양의 대학 합격 소식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나는 자기추천자 전형이 뭔지도 몰랐다. 언뜻 듣고서 ‘설마 자기가 자기를 추천해서 대학에 들어간다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맞는단다. 순간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겸손을 미덕으로 알라고 배워온 한국적 교육 탓도 있겠다. 반장선거나 인기투표에서 자기 손으로 자기 이름 써내는 아이들에게 (속으로는 부러워할망정) 뜨악해지던 심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한편으론, 잘만 하면 합리적인 입학전형방식 중 하나가 되겠다 싶기도 하다. 특정한 분야에 뛰어난 능력이 있는 학생이나 다양한 특별활동에서 두각을 보인 학생이 응당 존중받아야 된다는 논리에서만은 아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자기 자신을 팍팍 밀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과 ‘깡’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학생활 뿐 아니라 무얼 해도 치열하게 잘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에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수험생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매우 솔직하게 말하건대, 만약 내가 올해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입장이었다면, 그리하여 2006학년도 대학입시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보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확률이 높다. 문근영 양이 그 전형에 합격할 만한지에 대해서라면 나는 뭐라고 판단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오히려 이번 일을 둘러싸고 감정적으로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그 또래 다른 학생들에 대해서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그들이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쏟아내는 글들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왜 그렇게 거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죽일 놈의’ 대한민국고등학생 노릇을 3년 동안 꾸역꾸역 해보지 않았다면 어림없을 일이다. 멀고먼 곳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깜깜한 터널 바닥을 벅벅 기어 나오던 그 기분을 몰랐다면, 마침내 툭 터진 출구에 다다랐을 때 어쩐지 더욱 초라하고 막막해지기만 하던 그 느낌을 몰랐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반응을 상대적 박탈감이라 명명하고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기에 앞서, 가슴이 먼저 아프다. 열아홉 살, 학력고사에서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고 나서, 나는 내 인생이 이제 영원히 ‘그저 그런 색깔’로 규정되어 버렸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부한 경구는 가끔 옳았다. 끝난 줄 알았던 데에서 길은 다시 끝없이 이어진다. 나의 삶은, 또 내 친구들의 삶은, 우리가 열아홉 살 때는 죽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아직도 숨차게 흘러가고만 있다.
김명인 시인은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이 강인한 문장이 길 위를 타박타박 걷고 있는 대입 수험생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아아, 이 나라에선 대체 언제쯤 대학입시라는 것이 좀 사소해지려나? 요원하기만한 헛꿈인가!
정이현/소설가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