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임시정부 청사에서 태극기를 든 박찬호(맨 오른쪽)와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출연진. 문화방송 제공
“옛날부터 한국에선 ‘일본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국가대표 운동선수 시절 저한테 일본은 항상 이겨야 하는 존재였어요. 그렇게 정신무장 하기 위해서는 왜 일본엔 패하면 안 되는지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역사에는 항상 관심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역사는요.”
왜 박찬호일까, 했던 궁금증은 이 한마디로 해결됐다. 임시정부 수립 100돌인 2019년이 밝자마자 방송사들은 앞다퉈 관련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의렬단의 독립전쟁>(에스비에스 6일 방송)과 함께 선발대로 7일 시작한 교양 다큐멘터리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문화방송·21일 마지막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체험하는 내용인데, 박찬호가 등장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박찬호와 ‘역사’라는 주제가 언뜻 잘 엮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에 김구 선생님이 승려로 계셨고, 유관순 열사님도 공주에서 학교를 다니시고. 제 고향 공주가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깊어서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동안 주로 야구 선수로 방송인으로 독자들을 만나왔던 박찬호는 최근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지하게 밝혔다.
“역사를 알아야 앞으로 생길 혹시 모를 일들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그는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를 촬영하느라 지난해 10월 5박6일간 중국에 다녀왔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이자 임시정부가 거쳐갔던 상하이, 광저우, 충칭 등을 직접 둘러봤다. 답사 중 그가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당시의 역사가 거의 보존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충칭의 토교 한인촌은 임정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1940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산 곳인데, 현재는 버려진 공장 구석에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어요. 임시정부가 시작됐던 1호 청사도 아직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요. 보존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 거의 없었어요.” 그는 “후손으로서 조금 더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보존의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를 알려면 “독립운동가들을 알아보는 게 첫번째 순서”라고 했다. 그는 이번에 프로그램을 촬영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독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세탁소에서 일했던 것 등을 알게 됐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아닌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게 가슴 뭉클했다고 한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그 하루하루가 모여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때 당황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먼저 파악한 뒤 그분들이 살던 곳도 가보면 더 많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립원정대 콘셉트처럼 역사의 장소를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패키지여행 상품이 생겨 시청자들이 직접 체험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놨다.
딸 셋 아빠인 박찬호는 “아이들이 역사에 자발적으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평소 가족들과도 역사를 이야기한다. 특히 그의 아내는 재일 한국인 2세다. “아내는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아내에게 제대로 된 한국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어요.” 그는 윤봉길 열사가 아이가 둘인 가장이면서도 대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더 위대하고, 존경스럽다고 했다.
박찬호는 ‘투 머치 토커’로 불리며 이제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다. 에스비에스 제공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에 비할 순 없지만, 그 역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온 나라에 시름이 깊었던 구제금융기에 25살의 박찬호는 한국 야구 선수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 순간부터 책임감을 숙명처럼 떠안았다. 그가 공을 던질 때마다, 국민들은 ‘박찬호’를 환호하며 힘을 얻었다. 그는 “최초의 메이저리그 진출로 과분한 응원과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을 돌려줘야 한다.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티브이에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그는 ‘예능 기대주’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지난 추석에만 <독수공방> <빅픽처 패밀리> 등 그를 내세운 특집이 두개나 만들어졌다. 시청자들은 진지한 말을 좔좔 쏟아내는 그를 ‘투 머치 토커’라고 부르며 재미있어한다. 스스로 ‘투 머치 토커’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다른 나라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한 상황이 많았다. ‘그간 겪어서 깨달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그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 것 같다”며 사실상 ‘인정’했다.
“저도 가끔은 말하는 게 피곤할 때가 있는데(웃음) 별명이 ‘투 머치 토커’가 된 이후엔 핵심만 짧게 말하면 사람들이 서운해하거나 기분 안 좋냐고 물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귀에 피가 나더라도 시청자들이 행복하다면, 앞으로도 더 열심히 수다를 떨어보겠습니다.”
그라운드를 넘어 이제는 티브이에서, 그의 ‘투 머치 토킹’은 역사의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