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미, <핑크 프로젝트-지유와 지유의 핑크색 물건들>, 라이트젯 프린트, 2007년. 윤정미
내가 다녔던 산부인과는 태아의 성별을 임신 8개월에야 알려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출산 준비를 하러 다닐 때에도 뱃속 아기의 성별을 모른 채로 신생아 용품을 사러 다녔었다. 아이의 보디슈트를 사러 갔던 날, 가게 주인은 내게 대뜸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뱃속 아기 성별 어떻게 돼요? 파란색은 아들옷, 분홍색은 딸옷!” 아직 성별을 모른다며 쭈뼛거리자 주인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아, 성별 몰라요? 그럼 흰 보디슈트!” 그렇게 나는 그날 흰옷만을 잔뜩 사 와야 했다.
세상 빛을 보기도 전부터, 이미 색깔을 통해 남녀가 구분되는 아이들. 그렇다 보니 아이가 태어나 자랄 때의 상황은 어떨지 불 보듯 빤한 노릇이다. 핑크색 옷과 장난감만 원하는 딸을 보고 착안해 2005년부터 시작했다는 윤정미 작가의 <핑크 프로젝트> 시리즈는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여자아이의 분홍색 물건들만 질서정연하게 모아 배열해봤더니, 어찌나 많던지 바닥과 벽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여자아이들의 물건도 꺼내 배열해봤는데 문화적 배경과 인종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분홍 일색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 남자아이의 파란색 물건들만 모아 배열한 <블루 프로젝트>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색깔 코드에 따라 여자아이들은 분홍색, 남자아이들은 파란색 물건을 수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을까?
페기 오렌스타인의 책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에 따르면, 아이들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성별에 따른 색깔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세제 품질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위생상 아이 옷은 주로 삶았는데, 난관이 있었다. 염색 기술이 요즘만큼 발달하지 않아 색깔 있는 옷을 삶으면 모두 물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실용적으로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의외의 사실은 또 있다. 옛날엔 오히려 파랑이 소녀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 애니메이션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 프린세스계 할머니 격인 신데렐라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채 무도회에 출석하고, 앨리스 역시 파란색 옷을 입은 채 이상한 나라를 휘젓고 다녔으니까. 1918년 6월 미국의 한 무역전문지에도 “소년은 핑크, 소녀는 파랑이 일반적으로 통하는 규칙이다. 핑크는 더 단호하고 강인한 색이고, 파랑은 더 섬세하고 앙증맞아 예쁘기 때문”이라는 글이 실렸다니 지금의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과거와 달리 ‘핑크 걸’ ‘블루 보이’라는 고정관념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는 더 많은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주의 기업의 상술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성별에 따른 색깔 이미지를 ‘고안’한 뒤 마케팅을 하고, 이를 통해 성별이 다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장난감을 이중으로 구매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딸이 쓰던 분홍색 장난감을 남동생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추가로 파란색 장난감을 구매하게 만드는 상황 말이다.
우리 가족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얀색 보디슈트를 입은 채 세상살이를 시작한 나의 딸아이는, 마치 <핑크 프로젝트>의 주인공처럼 점점 분홍색 물건들로 자신의 방을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어쨌든 사회는 여자아이에게 분홍을 권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딸이 분홍을 좋아하는 것은 아이가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사회화가 잘된 딸을 둔 엄마의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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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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