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허문영
몇 개월 전 이 지면에 어울리지 않게 황우석 교수에 관한 글을 썼고, 이제 그것의 맺음말을 쓰려 한다. 황우석 파동으로 한국 혹은 한국인은 많은 것을 잃을 것이라고들 한다. 얼마나 많은 걸 잃을지 말할 지식은 내게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중요한 걸 알게 됐다.
우리는 견해와 사실과 전문 지식을 혼동했는데, 이제 그것을 더 이상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태풍>을 본 100만명의 관객은 100만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견해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한 견해가 다른 견해를 경청한 뒤, 비판하거나 지지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이다.
난자를 사고팔았는지 여부, 논문이 조작됐는지 여부는 사실에 속한다. 거기에 견해가 관여해선 안 된다. 견해는 확인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론인은 사실에 책임을 지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한 언론이 그것을 시도했다. 비윤리적인 취재방식을 제외한다면,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황 교수의 과학적 성과라는 전문 지식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그가 가령 심지어 범법을 저질렀다 해도,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전문 지식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그것은 피디수첩도 알기 힘든 일이다. 그것은 전문가 그룹이 말해야 한다. 그것을 전문가들이 하고 있다. 그 역시 정상적인 과정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정상적인 과정을 부인하는, 오직 하나의 견해가 다른 모든 견해는 물론이고 사실과 전문 지식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초래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 하나의 견해에 담긴 욕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 욕망 중에는 난치병 환자와 그 친지들의 욕망이라는, 그것이 사실과 전문지식을 듣지 않으려 한다 해도 공감할 수 있는, 절실한 소수의 욕망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한 거대 언론사를 위기로까지 몰고 간 여론의 다수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그 욕망에는 다른 것이 있다. 거기엔 고전적 산업혁명의 연대기에서 배제된 한국의 뿌리 깊은 저개발의 기억이 작동한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진보든 보수든 우리 누구도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기대고 싶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두 손 모아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이 배양한 어떤 욕망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어 제국주의 게임을 은밀히 불러들임과 동시에 정상적인 소통을 억압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생체 실험이 의학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 황 교수 지지 근거가 되고, 한국인의 52%가 지지했다는 자국 핵무장조차 진보적 견해의 일부로 해석되는 21세기 한국에서 좌우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진보가 여전히 가치 있는 태도라면, 그것은 경청하는 자의 것이다. 진보에 가깝다고 생각돼온 한 온라인 언론사는 경청하지 않았다.
권위 있음을 자처하던 많은 집단과 기관들이 부정 의혹을 받고, 공정성을 의심받으며, 전문성마저 불신당해왔다 해도, 그래서 사실과 전문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 다중의 감성적 판단에 기대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됐다 해도, 다중으로서의 우리의 견해가 매우 취약한 사실과 전문성의 기반 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승조의 견해도 강정구의 견해도 단칼에 벨 수 있는 멍청한 견해가 아니다. 그 견해 속에 놓친 사실이나 내가 모르는 전문지식이 있을지 모른다. 박노자는 “참된 개인주의야말로 진보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는데, ‘참된’의 자리에 ‘경청하는’을 넣고 싶다. 집단주의의 수사로 동원돼온 희생, 사랑, 휴머니즘, 애국보다 초등학생의 윤리인 경청이 상위의 윤리라는 걸 알게 됐다. 허문영/영화평론가
권위 있음을 자처하던 많은 집단과 기관들이 부정 의혹을 받고, 공정성을 의심받으며, 전문성마저 불신당해왔다 해도, 그래서 사실과 전문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 다중의 감성적 판단에 기대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됐다 해도, 다중으로서의 우리의 견해가 매우 취약한 사실과 전문성의 기반 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승조의 견해도 강정구의 견해도 단칼에 벨 수 있는 멍청한 견해가 아니다. 그 견해 속에 놓친 사실이나 내가 모르는 전문지식이 있을지 모른다. 박노자는 “참된 개인주의야말로 진보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는데, ‘참된’의 자리에 ‘경청하는’을 넣고 싶다. 집단주의의 수사로 동원돼온 희생, 사랑, 휴머니즘, 애국보다 초등학생의 윤리인 경청이 상위의 윤리라는 걸 알게 됐다.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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