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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영웅 서사’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등록 2019-06-15 09:28수정 2019-06-15 10:05

[토요판] 그림 속 여성
⑭앙겔리카 카우프만, ‘테세우스에 의해 낙소스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
앙겔리카 카우프만, <테세우스에 의해 낙소스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 1782년께, 캔버스에 유채, 드레스덴 국립회화관.
앙겔리카 카우프만, <테세우스에 의해 낙소스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 1782년께, 캔버스에 유채, 드레스덴 국립회화관.
얼마 전 ‘1919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라는 콘텐츠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이용자가 몇 개의 질문에 답하면 그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를 알려주는 내용이었는데, 재미 삼아 해본 나의 결과는 주세죽(1898~1953)이었다. 부끄럽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일제는 주세죽을 가리켜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했다는데, 나는 왜 이제껏 그녀의 이름을 접하지 못했던 걸까. 내친김에 유명한 독립 영웅들의 이름을 손꼽아봤다. 유관순 빼고는 남성의 이름부터 줄줄이 떠올랐다. 남성들만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독립운동뿐만이 아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기록 속에서도 영웅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광장을 메우고 대오를 이끄는 ‘80년대 주력’은 남성 대학생, 넥타이 부대, 남성 노동자였으니까.

그렇다면 ‘영웅 서사’ 속 여성의 자리는 보통 어디였을까. 역시 젠더 문제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인지, 이역만리의 옛이야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크레타섬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겪은 일을 따라가 보자. 크레타섬에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사는 미궁이 있었다. 어느 날 아테네에서 온 테세우스라는 남성이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한 아리아드네는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지혜를 빌려줄 테니, 대신 아테네로 돌아갈 때 자신을 아내로 맞아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미궁은 너무 복잡해서 한번 들어가면 입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괴물을 죽이더라도 테세우스가 돌아오지 못할 우려가 컸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었고, 그는 미궁의 입구에 실을 묶은 채 들어가 괴물을 죽인 뒤 풀었던 실타래를 다시 감으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아리아드네와 함께 금의환향하러 가는 길, 테세우스는 낙소스섬에 잠깐 들르게 되는데 이때 아리아드네의 뒤통수를 친다. 아리아드네가 깜빡 잠이 든 사이, 테세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해안에 버리고 떠난 것이다. 앙겔리카 카우프만이 그린 <낙소스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는 이 사실을 알아차린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눈에 섬에서 점점 멀어지는 테세우스의 배가 들어온 순간,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리아드네의 심정은 그녀의 발밑에서 울고 있는 사랑의 신 큐피드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테세우스의 마음은 어땠을까. 양심의 가책이 몰려오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며 다잡았을 것이다. ‘영웅’의 시선은 미래를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테세우스가 영웅으로 가는 길을 잘 뒷받침해준 것 자체로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뿐. 그까짓 마음의 빚 때문에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보고 읽은 영웅 서사 속 여성은 아리아드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뒤에서 그림자처럼 도와주는 연인이거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숭고하게 희생되는 존재이거나. 반면 남성은 그녀들을 희생시켰다는 자책과 후회마저도 더 큰 성장의 거름으로 삼으며 성공적으로 영웅이 된다.

남편에게 넌지시 ‘주세죽’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어, 그 사람 박헌영 아내잖아?”였다. ‘차가운 시베리아에서 뜨거운 심장으로 살아낸 사회주의자’도 이렇듯 누군가의 아내로 기억될 뿐이다. 역사에 여성들이 없었던 적은 없다. 그저 남성 중심 기록물 속에서 여성은 의미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채 박제됐을 뿐이다. 이제 그녀들의 본래 얼굴을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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