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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침묵의 시간’ 허용않는 방송의 세계…

등록 2006-01-04 18:17수정 2006-01-05 14:37

허문영 영화평론가
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나에게 종종 열등감을 안긴다

몇 년 전 공중파 방송의 좌담 프로에 나갔다가 “방송을 위해 다시는 나가지 마라”는 주변의 충고를 듣고 다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직업상 거절할 수 없는 인터뷰 때문에 1년에 몇 번씩은 짧은 방송 취재에 응하게 된다. 이때 인터뷰어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종종 요구하는 건 “좀 빠르게 좀 크게 말하라”라는 것이다. 내가 익힌 요령은 목소리의 톤을 좀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통과된다.

방송은 고음의 세계다. 방송 진행자의 요구를 받고 난 뒤에야 방송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높은 톤으로 빠르게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귀도 그 세계에 충분히 익숙해져있지만, 때론 완전한 적막만큼이나 그 고음의 세계가 부담스럽다.

잘 때 허전해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들 때가 많은데, 그 때 틀어놓는 것이 케이블의 바둑채널이다. 수십여개의 채널을 통틀어 오직 이 채널만이 낮은 톤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대국장의 정적, 해설장과 대국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편집, 해설자의 나즈막한 음성, 그리고 간헐적인 침묵은 약간의 불면증이 있는 내게 좋은 자장가다.

나는 이창호를 좋아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승부사다. 조훈현처럼 “졌네, 졌어”를 수없이 중얼거리지도 않고 유창혁처럼 상대방을 종종 흘겨보지도 않는다. 그는 시종 말없이 오직 반상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치 그 곳에 돌을 놓는 행위가 쑥스럽다는듯 조심스럽게 돌을 얹는다. 나는 그가 단 한번도 ‘딱’ 하는 소리를 내며 힘차게 착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고요한 바둑 텔레비전 안에서도 그는 가장 고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방송 안에서 그는 늘 어색하다.

방송이 고음 외에 추구하는 게 있다면 그건 순발력의 언어다. 방송은 내게 종종 열등감을 안기는데, 그것은 출연자들의 비범한 순발력의 언어 때문이다. 나는 탁재훈의 순발력에 늘 감탄한다. 상대방의 어떤 말에도 기상천외한 덧말을 즉시 쏟아내는 그의 언어감각은 가히 달인의 경지다. 역시 뛰어난 순발력의 김제동이 종종 교화와 계몽에 이끌리는 반면 탁재훈은 전적으로 말과 말 사이의 긴장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더 뛰어난 장인이다.

탁재훈 뿐만 아니라 전문 엠시나 개그맨이 아닌 그렇게 많은 젊은 가수, 연기자들도 그토록 뛰어난 순발력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한 연예 프로에 등장하는 ‘당연하지’ 게임은 노골적인 언어의 순발력 게임이다. 실은 거의 모든 연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은연중에 언어 순발력 게임을 벌인다. 순발력의 언어가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최상의 언어라는 이데올로기를 방송은 은밀히 전파한다.

그 언어를 깊이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소용없는 짓일 것이다. 가벼운 언어의 유희를 끝까지 밀고 가는 게 그들이 하려는 일이며, 때로 다변의 위안을 얻으려는 우리가 원하는 그들의 몫이다. 다만 순발력의 언어는, 즉각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 혹은 끝내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 하지만 꼭 짊어져야 할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침묵과 고요를 필요로 하지만, 순발력의 언어가 고음에 실려 최강의 언어가 될 때 그 질문들은 사라져간다.


지난해 한국인이 신문구독료와 학습지까지 포함해 인쇄물 구입에 쓴 돈이 한 달에 1만원 남짓이라고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과장이지만, 적어도 책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순간에도 그것과의 대화를 멈추고 침묵하는 시간을 허용한다. 책이 사라질 때 질문들도 사라져간다. 바둑평론가 박치문씨는 바둑 밖에 모르던 이창호가 ‘서치’(書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책에 빠져들면서 성적이 뚝 떨어지자 걱정스럽다는 말을 그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창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지요.”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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