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놀라운 미러링이 있을 수 있는가. 높다란 빌딩을 올려다보며 출세의 야망을 불태우는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길거리 변호사다. 상대방 변호사의 뒤통수를 쳐서 승소하고, 의뢰인이 법정까지 가지 않도록 온갖 회유와 협박을 벌인다. 그를 죽이겠다거나 변호사 일을 그만두게 만들겠다는 협박도 잦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잔혹함과 능청스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그는 고상하거나 양심적이거나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비천한 과거를 지니며, 극렬하고 야비하다. 자본가의 개가 되길 마다치 않고, 잡초 같은 생명력과 천부적인 능력으로 재벌가의 더러운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자,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가 여성일 것으로 상상한 이가 몇이나 있으랴.
드라마 <하이에나>(에스비에스)의 정금자(김혜수)는 그동안 남성에게 주어졌던 입체적인 캐릭터가 여성에게 부여된 드문 예이다. 다소 만화적인 느낌도 있다. 하지만 김혜수의 팔색조 같은 매력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직장의 신>(한국방송2·2013년)에서 탬버린을 치던 ‘미스 김’의 퍼포먼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하이에나>에서 ‘여러분’을 부르며 좌중을 휘어잡는 정금자의 캐릭터를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진 않을 터다.
정금자는 기존의 드라마 속 전문직 여성 캐릭터와 다르다. 이제 전문직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는 흔하다. 하지만 여전히 의욕만 가득한 순진한 인간(<낭만닥터 김사부 2>의 차은재, <유령을 잡아라>의 하마리 등)으로 그려지거나,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상식적인 열정을 불태우는 인물(<비밀의 숲>의 영은수, <닥터 프리즈너>의 한소금 등)로 그려지기 일쑤이다. 그보다 한발 나아간 것이 정의롭고 유능하고 일 욕심이 많은 에이스(<검사내전>의 차명주, <닥터 탐정>의 공일순 등)로 묘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금자처럼 법과 도덕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타일리시한 존재는 없었다. 특히 위장 연애로 윤희재(주지훈)를 ‘후린’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다.
윤희재는 법조계 명문가 출신의 일류 로펌의 변호사로, 자신을 최고라 여겨왔던 자신만만한 남자다. 통상 비밀스러운 전사를 지닌 야전형 인간은 남성으로, 금수저 엘리트에 자신감 충만한 인간은 여성으로 설정된다. 또한 사랑을 이용해 상대를 속이는 것은 주로 남자고, 사랑에 빠져 공적인 일을 그르치며 자존심에 엄청난 손상을 입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여성으로 설정되어왔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하지만 <하이에나>는 이런 관습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뿐인가. 윤희재는 “옆머리 눌렸다”는 말에 민감할 만큼 외모에 신경을 쓰고, 카메라는 그의 ‘슈트발’과 근육질의 몸을 미려하게 잡는다. (심지어 그를 흘낏 보는 게이 클럽 남성들의 시선도 삽입된다.) 정금자는 윤희재를 보고 “섹시하다” 혹은 “귀엽다”며 웅얼거리고, 그의 순정 어린 토로에 이따금 마음이 흔들린다.
윤희재뿐이 아니다. 드라마 속 다른 남자들도 감정에 휘둘리고 자아가 취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재벌가 장남인 하찬호는 내연녀가 없으면 제정신으로 살지 못한다. 헤어지자는 말에 내연녀를 감금하고, 여자가 떠나자 술과 약에 찌들어 산다. 천재 연주자 고이만은 엄마에게 평생 부당한 착취를 당하지만, 엄마 품에서 독립하지 못하는 유약함을 보인다. 반면 그런 남성의 맞은편에 있는 여성들은 대단히 막강하다. 재벌가 딸 하혜원은 똑똑하고 야망이 그득하다. 고이만의 엄마는 아들의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며 지배력을 내뿜는다. 로펌 ‘송앤김’의 숨겨진 한 축인 김민주(김호정)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다 국내로 돌아올 예정으로, 송필중(이경영)과 맞서는 강단과 능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정금자와 단짝을 이루는 이지은(오경화) 사무원도 흥미롭다. 그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에 놀라운 정보력과 실무능력을 지녔다. 남성들이 대상화하는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열전인 셈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탁월한 능력과 욕망을 지닌 다채로운 여성상을 보여주는데, 하이에나는 암컷이 서열이 더 높고 가모장제를 따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센스 있는 작명이다.
다만 정금자의 능력이 결국 어디를 향하는지는 곱씹어볼 일이다. 정금자는 재벌가의 막장 불륜을 돕고, 데이트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여자를 협박해 주저앉히고, 무능한 장자가 재벌 승계를 하도록 돕는다. 또한 운전기사를 시켜 가사도우미를 폭행한 재벌가 사모의 갑질을 비호하고, 심지어 음란물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팔아먹은 악덕 기업인의 범죄를 은닉하려 한다. 정금자의 능력이 그나마 여성을 위해 쓰인 것은 하찬호의 전처에게 자식의 친권을 갖게 한 것뿐이다. 물론 정금자는 자신이 일하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함’이라 말한다. 그의 성공을 향한 욕망은 순수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번번이 반여성적인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금자의 성공을 향한 몸부림을 응원하면서, 그가 자신의 행위가 반여성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각성하는 계기가 조만간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