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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매니저? 개인비서? 연예인 뒤 그림자 ‘로드매니저 인생’

등록 2020-07-02 04:59수정 2020-07-02 11:39

[‘이순재 사건’으로 본 매니저 세계]
“나는 매니저이자 개인 비서였다.”

수년 동안 한 연예인의 현장(로드) 매니저로 일했던 ㄱ씨가 <한겨레>에 털어놓은 고백이다. 그는 운전으로 담당 연예인의 이동을 돕는 본연의 업무뿐 아니라, 사적인 일도 함께 거들었다. 해당 연예인이 이사 가는 날 이삿짐도 날라야 했고, 택배를 보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심지어 해당 연예인의 자녀가 하교하기를 기다렸다 학원까지 데려다주고, 학원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가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연예 매니지먼트사를 차리고 싶은 꿈을 꾸며 매니저가 됐지만, 주로 집안일을 거들었다”며 “이순재 선생님의 부인이 전 매니저에게 시켰다는 각종 허드렛일이 나로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배우 이순재의 부인이 매니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는 보도가 나간 뒤, 매니저들은 업계에서 쉬쉬하던 일이 터졌다고 입을 모은다. 연예인과 늘 동행하는 현장 매니저에게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ㄱ씨는 “개념 있는 연예인도 많지만, 이를 관행이라 생각해 아무렇지 않게 잡일을 시키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순재 선생님 부인만의 일이라기보다는 이를 묵인해온 업계 전체의 문제”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매니저의 처우가 달라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케이(K)-컬처가 전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시대지만, 국내 연예계 노동 환경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특히 현장 매니저에 대한 처우가 그렇다. 매니저를 업무 파트너가 아닌 잡일을 거드는 개인 비서로 여기는 인식은 여전하다. 매니저는 운전을 담당하는 현장 매니저부터 시작한다. 경력이 쌓이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스케줄을 결정하는 관리 업무를 맡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현장 매니저에서 시작해 간부급이 된 매니저 ㄴ씨는 “현장 매니저는 운전뿐 아니라 일터에서 연예인이 최대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도 임무”라며 “특정 브랜드의 커피를 고집하는 등 다소 까다로운 요구도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들어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현장 매니저가 온갖 ‘잡일’을 해준다는 생각에 개인 비서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현장 매니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주먹구구식 채용 때문이기도 하다고 매니저 ㄷ씨는 말한다. 최근엔 대형 기획사나 유명 중소형 기획사에서 매니저를 정규직으로 뽑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계약서도 쓰지 않고 그때그때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매니지먼트사 1120곳(2018년 기준) 중에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곳은 14.3%,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곳은 18.3% 정도였다.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현장 매니저의 경우엔 비정규직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매니저들은 내다본다. 한 중소 기획사 간부는 “연예인과 일한다는 환상만으로 왔다가 운전을 시키면 힘들다며 몇주 만에 그만두는 이들이 많아 진짜 성실한 친구를 가려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뽑는다면 회사 역시 제대로 된 직원을 선발하게 될 것이라고 ㄷ씨는 반박한다. 그는 “현장 매니저만 비정규직으로 따로 뽑는 경우가 많다. 잘한다고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며 “내가 입사할 때 회사에서 눈여겨본 것은 무사고 운전자라는 점이었다. 내가 매니저로서 재능이 있는지 등은 따져보지 않더라”고 말했다.

이들은 휴일도 없이 연예인이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ㄱ씨는 “공식 일정도 아니고 개인 술자리에 불러내 끝날 때까지 차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상황에 가장 큰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고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이순재의 전 매니저도 <에스비에스 8 뉴스> 인터뷰에서 “두달 동안 주말을 포함해 쉰 날은 단 5일로, 평균 주 55시간 넘게 일했지만, 휴일·추가 근무 수당은 없었고 기본급 월 180만원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을’의 처지다 보니 문제 제기도 쉽지 않다. ㄱ씨는 “해당 연예인에게 1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쉬게 해달라고 말했다가 큰소리를 들었다”고도 털어놓았다.

물론 연예계 업무의 특성상 일반 회사와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기는 쉽지 않다. 이순재도 지난 3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우리 일은 옛날부터 시간이라는 게 없다. 밤을 새우고 새벽에 나가고 다시 또 밤을 새우고, 이게 우리 직업의 특성이기 때문에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연예인 1명당 매니저를 2명씩 붙여 번갈아 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지만, 그런 여유가 있는 곳이 많지 않다. 하지만 업계 전체가 매니저라는 직업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순재의 소속사인 에스지웨이엔터테인먼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로드 매니저들이 사적인 공간에 드나든다고 해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순재는 “나로 인해 이 문제가 생겼으니 근로시간 등에 대해서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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