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여년 전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명장 고선지의 당군과 압바스 왕조의 이븐 살리히가 이끄는 석국(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이슬람 연합군이 격전을 벌였던 탈라스전쟁의 전투 현장, 포크롭카 언덕의 옛 유적은 온데간데 없다. 하지만 벌판 군데군데 무덤처럼 보이는 흙무지들이 뭔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5> 탈라스 전쟁의 현장을 찾아내다
국경 초소에서 동남쪽 7㎞, 격전장이던 탈라스강변의 평원 지하에 적어도 200여기 무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카자흐스탄 대초원을 가로질러 이곳 잠부르를 찾은 것은 저 유명한 탈라스 전쟁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명장 고선지는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11년간(740~751)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을 단행했다. 그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멀리 석국(石國: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 일원)에 대한 원정이다. 특히 다섯 번째 원정 때, 당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간에 벌어진 전쟁을 흔히 ‘탈라스 전쟁’이라고 한다. 탈라스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전쟁터가 어딘가’ 논란 이 전쟁은 세계 전쟁사, 문명교류사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도 길이 남을 역사적 장거였다. 동서양 학계에서도 일련의 연구가 진행되어 그 면모가 개략적이나마 드러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여러 측면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전쟁터가 도대체 어딘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하게 역사상의 구(舊) 탈라스라고 지목하지만, 그 탈라스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를 놓고도 탈라스성이니, 탈라스평원이니, 탈라스강이니 하는 등의 주장이 엇갈린다.
한가닥 실마리라도 찾았으면 하는 기대에 어제의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찍 잠에서 깼다. 오늘 일정도 만만찮아 서둘러야 했다. 아침 7시 반 잠부르 호텔을 떠나 시원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남쪽으로 약 30분간 20km쯤을 달렸다. 다음 목표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들어가는 국경 초소가 나타났다. 아침인데도 국경은 몹시 붐빈다. 과객 대부분은 보따리 장수들이나, 친척 방문자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즉석에서 입국비자를 내주어 국경 통과 과정은 무사했다. 알마티부터 길라잡이를 해준 현지 안내원은 키르기스스탄 여행사가 파견한 22살의 아르쳄이다. 대학 영어과를 갓 나와 여행사 가이드로 일하는 그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젊은이다. 우리가 탈라스 전쟁의 현장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지역 전문가 나르보토예브를 안내자로 초청했다. 천만 뜻밖이다. 그는 여행사의 이름으로 전통모자인 ‘칼팍’(돔 모양의 흰색 펠트모자)을 선물하기도 했다.
일행이 국경 초소에서 5분 거리인 한 유르트(이동식 텐트)모양의 커피숍 마당에 이르렀을 때다. 50대 후반의 주인 아킬베크가 한사코 우리를 집안에 초대했다. 가끔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한다. 부인과 딸을 불러다가 시큼한 ‘크므스(마유주)’와 홍차를 내오면서 친절하게 대접했다. 헤어지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좋은 추억을 되새겨준다. 이윽고 나르보토예브가 왔다. 탈라스의 ‘마나스박물관’ 학예연구관을 10여년 지낸 40대 중반 역사학자다. 방문 목적을 귀담아 듣고는 자신만만하게 안내에 응했다. 그의 자신감에서 무언가 길조를 예감했다. 탈라스는 원래 강 이름이다. 톈산산맥 남쪽 지맥인 탈라스 연산(連山)에서 발원해 무쥰산맥에 이르러 복류(伏流: 땅 속으로 스며서 흐르는 물)로 변한다. 길이 230km에 이르는 탈라스 강은 기원전 2세기 ‘도뢰수(都賴水)’란 이름으로 한적에 나타난다. 강 일대는 사카족과 월지, 강거, 흉노 등 유목 민족들의 활동 무대였다가, 6세기 말엽 서돌궐 치하에 들어갔다. 이 무렵 비잔틴 제국은 서돌궐과 화약을 맺기 위해 제마르코스를 사절로 파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탈라스는 서방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 문헌에도 탈라스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는 ‘달라사’ 등의 이름으로 중국 통치판도 안에 들어가면서 한적에도 관련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28년 구법여행을 위해 인도로 가면서 이곳에 들렀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탈라스성 둘레는 8~9리에 달하고, 성안에는 여러 나라 호상(胡商)들이 뒤섞여 살며, 토질은 밀, 포도를 심는 데 적당하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 날씨는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기록도 덧붙여 놓았다. 탈라스는 지리적으로 초원로와 오아시스로의 접지점에 자리잡아 역대 교역이 번성했다. 751년 7월 역사적인 탈라스 전쟁이 벌어진 뒤 그 위명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9세기 말 사만조가 이 고도를 공략하면서 주민들은 이슬람에 대거 귀의했다. 10세기 이후엔 카라한과 카라키타이의 관할 아래 있으면서 전성기를 누리다 13세기 몽골 점령군에게 파괴된다. 주로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많은 유적들은 탈라스의 이런 역사적 궤적을 여실히 증명한다.
탈라스에서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으로 가는 길은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길이다. 고지대인만큼 기상 변화도 다양하다. 안개인 듯, 비구름인 듯 몰려와 한바탕 비를 뿌리고 나면 갑자기 환하게 개며 햇살이 비추고 계곡 속에서 무지개가 솟아오르곤 한다.
한적의 기록과 출토된 유물 등을 참고해 러시아 동양학자 바르톨트는 1904년 탈라스강변에 위치한 당시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올리아타(奧立阿塔)’를 구탈라스에 비정했다. 러시아 10월 혁명 뒤엔 옛 소련 당국이 카자흐족 대시인 잠부르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잠부르’라고 개명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요컨대, 고대 중앙아시아사와 동서교류사에 등장하는 탈라스는 탈라스강 중류에 있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잠부르가 되는 셈이다. 옛 탈라스 ‘잠부르’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옛 탈라스(카자흐어로는 ‘타라즈’)와 탈라스강 상류에 있는, 현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키르기즈어)를 혼동시하고 있다. 다행히 이런 혼란은 현지 답사에서 시비를 가려낼 수 있었다. 나르보토예브의 안내를 받으며 동남 방향으로 40km쯤 가니 탈라스강 왼쪽으로 아담한 소도시 탈라스가 나타난다. 인구 5만명(주변까지 약 20만명)의 이 도시는 20세기 초에 건설되었다. 어디를 봐도 고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시가 1200여년 전 전쟁의 현장일 수는 없다. 잠부르와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는 서로 다른 도시인 것이다. 남은 문제는 구체적인 전투의 현장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문헌기록, 지세로 보아 오늘날 잠부르, 즉 구탈라스가 옛 전장 같지는 않고, 어딘가 다른 곳일 성싶다는 의혹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었다. 때문에 이 지역 출신 사학자의 안내는 필자를 솔깃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바르톨드와 베른슈탐, 압잠손 같은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키르기스스탄 국경 초소에서 동남쪽으로 7km 떨어진 탈라스강 오른쪽의 포크롭카 마을 주위 언덕이 탈라스 격전지라면서 현장을 안내했다. 그의 증언과 제시한 관련 문헌의 기록들, 지형지물, 유물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거의 일치해 포크롭카설은 상당한 수긍이 간다. 고구려 후예로서 기념비라도 세워야 이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탈라스강의 물길 폭은 18m(본래는 20~30m)가량 된다. 좌우 강안이 넓어 군사가 배수진을 치기에 유리하다. 이에 비해 27km 북상해서 구탈라스를 지나는 이 강의 폭은 10m쯤밖에 안되며 강안도 퍽 좁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강안을 따라 아득히 펼쳐진 드넓은 언덕 평원이 수만 대군들끼리 부딪히는 회전의 현장으로는 적격한 지형이라는 점이었다.
키르기즈스탄 국경 초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한 유르트식 찻집을 열고 있는 주인 아낄베크(왼쪽)씨 부부가 집 안을 보여주고 있다. 유르트는 중앙아시아 키르기스 지방의 유목민이 사용하는 이동식 천막으로 펠트를 재료로 원뿔 모양의 지붕과 원기둥 모양의 벽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보조 집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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