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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야, 제주 바람맞으며 수양하는 늙은 들판

등록 2020-09-11 04:59수정 2020-09-11 16:15

[제주섬 화가 강요배, 산문집 <풍경의 깊이> 출간]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lt;한겨레&gt;와 만나 담소하는 화가 강요배씨. 새로 출간한 그의 첫 산문집 &lt;풍경의 깊이&gt;에 대해 강 작가는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지난 60여년간의 삶과 사유의 행로를 기록한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한겨레>와 만나 담소하는 화가 강요배씨. 새로 출간한 그의 첫 산문집 <풍경의 깊이>에 대해 강 작가는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지난 60여년간의 삶과 사유의 행로를 기록한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사진은 딱 한 장면을 잡아내요. 예리한 매체지요. 하지만 덧칠할 수 있는 그림은 부드럽지요. 제 그림 또한 그래요. 날카롭게 주장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제주의 쓰라린 역사와 거친 대자연의 풍광을 30여년간 그려온 화가 강요배(68)가 인터뷰 첫머리에 꺼낸 말은 알쏭달쏭했다. 지난 8일 낮 경기도 파주의 출판사 돌베개 사옥에서 만난 작가는 선문답처럼 대화를 풀어갔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대가로 우뚝 선 그는 최근 자신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첫 산문집 <풍경의 깊이>를 출간했다.

“수필집이지요. 20대 때부터 60대까지 쓴 45년간의 글 34편을 꿰어 실었어요. ‘나무가 되는 바람’ ‘동백꽃 지다’ ‘흘러가네’란 제목으로 각각 1·2·3부를 구성했는데, 작업의 태반(胎盤)이 된 제주의 대자연 이야기에서 1부를 시작해 ‘4·3항쟁’의 역사를 담은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과 금강산 기행을 담은 2부를 거쳐 청년 시절과 지금의 글을 중심으로 공명하는 내용을 엮은 3부까지 현재-과거-미래를 오가는 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미술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마음공부를 했던 사유의 행로를 모은 겁니다.”

강요배 작가가 책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기억에 유난히 남는 작품으로 고른 1992년 작 &lt;마파람&gt;. 남쪽에서 비 오기 직전 마파람이 부는 제주의 대지를 그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의 기운이 들녘 식물들의 시커먼 실루엣과 부연 하늘을 배경으로 전해져 온다.
강요배 작가가 책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기억에 유난히 남는 작품으로 고른 1992년 작 <마파람>. 남쪽에서 비 오기 직전 마파람이 부는 제주의 대지를 그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의 기운이 들녘 식물들의 시커먼 실루엣과 부연 하늘을 배경으로 전해져 온다.

작가는 “나한테 그림은 평생 해온 마음공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라고 했다. 화가가 됐지만 몰입하진 않는다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책의 곳곳에 담았다고 했다. ‘그림을 중심에 두는 것보다 살아야 한다는 명령, 살아 있을 때라야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이야말로 내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림은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고백이 책 말미에 실린 사진가 노순택씨와의 대담에도 나온다.

“노순택 선생이 지난 40여년간 시대별로 작품과 세상을 대하는 정치 사회적 관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날카롭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한 컷을 찍는 사진은 예리한 느낌이 있구나 떠올려 본 겁니다. 제 그림이 부드럽다는 건 되새김질하듯 오랜 기간 다시 보고 덧칠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죠. 한편으론 그림이 저한테 목을 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강요배 작가의 2009년 작 &lt;서북벽&gt;.
강요배 작가의 2009년 작 <서북벽>.

강 작가는 ‘제주 4·3항쟁’의 투쟁과 비극을 화폭에 옮긴 역사화 ‘제주민중항쟁사’ 연작(1989~1992년)으로 한국 현대 역사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고향인 제주섬에 돌아와 작업실을 꾸리고 지금까지 20여년간 숱한 현장 답사와 사생, 사유의 과정을 거치며 특유의 자연 그림을 그렸다. 하늬바람이 빚어낸 오름과 고목, 야생의 동식물, 한라산과 바다 같은 자연을 재해석한 특유의 문인적 풍경화로 80년대 민중미술 작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대중적 명성을 쌓았다. 지금도 화랑의 그림 요청이 밀려들고 작가의 행보가 미술판의 화제로 떠오른다.

수필집 <풍경의 깊이>는 평생 <주역>을 비롯한 동서양 철학과 자연과학 저술에 심취한 자신의 인생 행보를 골기 가득한 문장으로 표현한 글 가운데 독자와 비교적 쉽게 교감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실었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는 “나의 호는 노야(老野), 늙은 들판이다”라며 자신의 자호를 소개한다. 그다음 2011년 자신의 자호를 제목으로 그린 대작을 실었다. 제주 중산간 화산토 땅과 늦가을 어스름 녘에 반짝이며 핀 물매화 등 야생화 무리를 그린 풍경이다. 뒤이어 <남천의 소묘>(2005)와 <별 흐름>(2004)이란 두 그림 도판이 등장하고, 다시 단문 하나가 등장한다. ‘가슴 한복판에 변치 않는 그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똬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방황해 온 궤적의 흔적이 바로 내 그림들이다.’

강요배 작가의 2005년 작 &lt;고원의 달밤&gt;.
강요배 작가의 2005년 작 <고원의 달밤>.

“노야는 그냥 지어본 거예요. 내가 가장자리 시골에 살고, 야생의 들판과 처지가 비슷한 것 같고, 편한 곳이기도 해서 붙인 거죠. 예순을 넘기니까 빨리 늙고 싶어졌어요. 노인이 돼 마음 편하게 좀 살고 싶어서요. 젊은 건 이제 피곤해. 그런 바람이 담겨 있어요. 노야란 그림은 늦가을에 쌀쌀하고 어둑한데 신비롭게 핀 제주 들꽃들의 모습이죠. 늦가을에 중산간 오름에 가보면 융단처럼 환해요. 그게 제주의 참모습이죠.” 노야란 호와 그림이 제주에 뿌리를 두고 마음 수양을 위해 작업하는 그의 그림과 삶을 전체적으로 표상하는 셈인데, 이런 사유를 실어주고 숙성시켜주는 매개체는 단연 바람이다. ‘바닷가 마을 서흘개에 불던 하늬바람. 우리 바닷가 마을 소년들은 바람까마귀들이었다. 그 회색 하늘 바람 쓸리던 나무, 검은 돌담 희학질하던 바람까마귀는 얼마나 깊숙이 마음속에 각인되었던가.’(38~39쪽 ‘서흘개’와 ‘드른 돌’)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돌베개 사옥에서 &lt;한겨레&gt;와 만나 이야기하는 화가 강요배씨.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돌베개 사옥에서 <한겨레>와 만나 이야기하는 화가 강요배씨.

바람을 맞고 성장해 바람을 맞고 작품을 만든 작가 강요배는 바람처럼 불어오고 스쳐 가는 느낌을 주는 첫 산문집에서 자연과 우주, 사회와 역사로 향하는 두 가닥 회로를 그림 속에 녹여낸 과정을 풀어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책에 쓴 단문대로 주저 없이 답했다. “편한 그림. 좀 더 허술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건 아니다”라더니 작업 중인 대작 이야기를 꺼낸다.

“김치처럼 절여놓은 작업이 있어요. 제주의 바람, 물, 고목 형상이 녹아 어우러지며 음악처럼 기운을 타고 흘러가는 작품인데, 화폭을 뒤집어놨다가 한참 뒤 슬슬 꺼내서 만지려고요. 급할 것 없어요. 말년까지 탐욕스럽게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관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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