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전 24살 청년사제로 한국 와
짧은 보좌신부 뒤 한국어 공부 전념
외국인 첫 한국 국문학 박사 학위
이규보·윤선도·김삿갓 등 시 번역
짧은 보좌신부 뒤 한국어 공부 전념
외국인 첫 한국 국문학 박사 학위
이규보·윤선도·김삿갓 등 시 번역
〔가신이의 발자취〕 케빈 오록 신부를 기리며
여든을 일기로 10월23일에 선종하여 춘천부활성당에 봉안된 케빈 오록 신부는 아일랜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다. 평생을 영문학 교수로 지냈지만 그는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헌신한 아주 특출한 한국문학 번역가였다.
2008년 가을부터 골롬반 센터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록 신부의 영시 강좌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 영자신문에 연재되었던 이규보의 영역 시를 읽고 감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즉시 등록했다. 그렇게 시작한 영시 수업은 매년 두 학기,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오록 신부는 매해 여름을 아일랜드 고향 마을 로잘리 바닷가에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가 고향 바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작년이었다.
1964년 스물넷의 청년 사제로 한국으로 파견된 오록 신부는 선교지에서의 사명을 좀 색다르게 시작했다. 춘천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짧게 보낸 후 그는 곧장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다. 선교지에서 ‘가르치는’ 선교사가 아니라, 그곳을 ‘배우는’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국 국문학 박사 1호가 되었다. 당신에게 남다른 문학적 소양이 있는지 여쭤본 적이 있었다. 오록 신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일랜드 사람에게는 뼛속들이 문학적인 면이 있습니다.”
오록 신부는 경희대 영문학과에 자리 잡으면서 바로 한국문학 번역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번역에 매달릴 수 있었으니까.
현대소설 번역도 다수 있지만 오록 신부의 주된 관심은 한시 번역에 있었다. 신라 향가와 고려가요, 조선 시대 한시 등 수백 편의 시들이 그분의 손을 거쳐 전세계 유수의 출판사에서 발표되었다. 한국의 전통시를 국제화하는 데 오록 신부가 일등공신이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규보, 윤선도, 김삿갓, 의상대사, 정철, 김시습, 허난설헌, 신사임당… 요즘 한국인들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 고전 작품들이 유럽의 서쪽 끝에서 온 벽안의 사제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오록 신부의 번역활동은 많은 성과를 이루었고 그에 합당한 평가도 받았다. 굵직굵직한 상들도 받았고 한국 정부로부터 한글날에 훈장도 받았다. 오록 신부는 자신의 번역활동이 ‘문학의 길’을 따라간 선교사의 여정이었음을 늘 이야기하곤 했다. 문학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사랑을 찾도록 하는 게 곧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에 다가가게 하는 좋은 사목활동이라는 말이다. 그는 골롬반 성인의 본을 그대로 따랐다. 성인은 획일적인 교회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으려 했던 이였다. 하지만 기존의 틀에 변화를 주는 일은 녹록치 않은 법이다. 때로 찬바람을 맞을지라도 오록 신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영시 수업에서 그분은 늘 이 점을 강조했다.
“시를 읽는 이유는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고 나오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시야말로 이 세상에 깃든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다. 지치지 말고 시 읽기를 계속하라.”
그 많은 번역을 했던 오록 신부가 백미로 꼽았던 시는 고려시대 승려시인 혜심의 ‘작은 연못’이다.
“바람이 아니 불고 파도가 아니 일어도/ 내 눈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세상/ 더 말이 필요 없네 / 그저 보는 것만으로 족할지니.”
병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오록 신부는 컴퓨터 앞에서 번역작업에 몰두했다. 반세기 넘게 이 땅에 살면서 한국문학의 밭을 성심성의껏 일구던 선교사 문학자 오록 신부님, 좋아하던 시인들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교유하시기를 빈다.
권은정/전문인터뷰어, 번역가

2019년 11월12일 케빈 오록 신부(가운데 검은색 상의 안경 쓴 이)의 팔순을 축하해 그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자택에서 영시반 제자들이 잔치를 마련했다. 오록 신부 오른쪽이 필자 권은정씨. 사진 권은정씨 제공

케빈 오록 신부. 사진 연합뉴스

2019년 10월30일 경북 안동 병산서원을 찾은 케빈 오록 신부(사진 왼쪽 둘째)와 영시반 제자들. 사진 권은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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