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 무덤 부장궤에서 돌절구와 공이가 출토되는 모습.
“돌절구가 나왔다!”
지난달 17일 경주 황오동 쪽샘 신라고분군 44호분 발굴 현장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의 환성이 터졌다. 2014년부터 조사한 5세기께 무덤의 주검 자리를 파고들어간 지 이틀 만에 희귀 유물인 돌절구를 발견한 것이다. 주검 자리를 덮었던 돌무지를 걷어내니 머리맡에 껴묻거리(부장품)를 놓는 궤(상자)의 흔적이 드러났고, 큰 철 솥 옆에 토기 같은 덩어리가 파묻혀 있었다. 손바닥만한 높이 11㎝의 돌절구 통과 내용물을 찧는 길이 14.4㎝의 공이였다.
막자사발처럼 약제를 빻는 용도로 보이는 이 돌절구는 생전 병에 시달렸던 무덤 주인의 평안한 사후를 위해 넣어준 듯했다. 유물을 수습한 심현철 연구원의 머릿속에 퍼뜩 기억이 스쳤다. ‘돌절구통과 공이가 한갖춤으로 발굴된 유물은 40여년 전 신라 최대 왕릉 황남대총에서 나온 출토품이 유일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돌절구가 나온 44호분은 보통 무덤이 아닌데….’
예측대로였다. 돌절구가 출토된 다음날엔 황남대총, 천마총 등 왕릉급에서만 나오는 비단벌레 장식품이 튀어나왔다. 물방울 모양 금동판 디자인에 영롱한 금녹색 빛을 내는 비단벌레 날개가 수놓아져 있었다. 비단벌레 날개를 전면에 수놓은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 가리개는 고대 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품이다. 그뿐만 아니다. 주검 발치 쪽 부장 공간에선 자연석 바둑알 200여개가 확인됐다. 4세기 중국에서 전래한 바둑 문화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부장품이다.
돌절구, 비단벌레 장식, 바둑돌은 신라 왕릉급임을 입증하는 ‘3종 유물 세트’다. 3종이 모두 나온 전례는 1975년 발굴한 황남대총 남분뿐이다. 조사단은 주검 자리에서 뒤이어 금관이 나오길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후속 발굴에서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무덤 주인은 대신 ‘出’(출)자형 세움 장식을 한 전형적인 신라 금동관을 썼고, 관에 이어진 금드리개 1쌍과 금귀걸이 1쌍, 가슴걸이 1식, 금은 팔찌 12점, 금은 반지 10점, 은 허리띠 장식 1점을 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가슴걸이는 남색 유리구슬과 달개 달린 금구슬, 은구슬을 4줄로 엮어 곱은옥을 매달았다. 관은 금동제였지만, 딸린 장신구는 금제와 은제가 섞여 있었다.
44호 무덤에서 나온 비단벌레 날개로 만든 금동장식. 기존 다른 신라 무덤에서 나온 비단벌레 장식물과는 다른 물방울 모양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보여준다.
44호분의 주검 자리(매장주체부) 전경 및 주요 유물 출토 위치. 주검을 놓은 곽 주위는 두 단의 석단을 쌓았고, 바닥의 돌들은 붉은 칠(주칠)이 되어 있었다. 무덤의 주검 상반신 주위엔 도교에서 불사의 선약으로 신봉했던 운모 조각들이 다량 확인됐다. 주검과 곽 사이에 여백 공간이 있는데 무덤 주인과 관련 없는 금귀걸이가 출토돼 순장자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연구소 쪽의 분석이다.
실제 비단벌레(타이산)의 모습. 은은한 금녹색 광채를 빛낸다.
특기할 만한 건 무덤 주인이 10대 미성년 여성으로 보인다는 점. 인골은 삭아 없어졌지만 출토품 기준으로 무덤 주인은 신장이 약 150㎝ 전후인 어린 여성이라고 조사단은 추정했다. 남성 피장자와 같이 묻히는 큰 칼이 없고 은장도만 나온데다, 금동관·귀걸이 등 장신구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다는 게 근거다. 어린 최상위 계층 여성이라면 공주일 가능성이 크다. 장신구가 작다는 점에서 어린 왕자 무덤으로 보는 인근 금령총과 비슷하지만, 금령총은 관·장신구 일체가 모두 금제였다.
주검 자리 발굴 현장을 확대한 사진. 무덤 주인이 두른 장신구 갖춤이 흰 선 표시된 몸 부위별로 보인다.
출토된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의 세부 모습.
연구소 분석을 종합하면, 44호분은 1등급인 제왕과 왕비 바로 아래 1.5등급 왕족 여성인 공주, 옹주의 매장 방식을 처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성 무덤에서만 나왔던 바둑돌이 왕녀 무덤에서 출토된 건 바둑 문화를 남녀가 함께 즐겼음을 시사한다. 풀어야 할 미스터리도 남는다. 왜 왕릉급 유물 세트 3종을 묻으면서 금관을 씌우지 않았을까. 물론 왕비 무덤으로 추정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금관이 나온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공주 같은 차상위 왕녀들은 금령총에 묻힌 왕자와 달리 금동관만 씌운 채 묻는 규정이 있었던 것일까.
44호 무덤 주검 자리 발치에서 출토된 바둑돌들의 모습.
국내 단일고분으로 가장 오랜 6년여 동안 집중 조사가 이뤄진 쪽샘 44호 무덤 발굴 현장 전경. 무덤 둘레에 작은 원 표시된 곳은 제기 항아리들을 묻었던 흔적이다. 봉분의 최대 직경은 30.8m이고 적석부의 장축 길이는 19m다. 조사결과 5톤 트럭 198대 분량인 16만4198개의 돌이 무덤을 조성하는 데 들어갔다. 신라인들은 이 돌들을 5열의 촘촘한 목조가구(비계)로 구획한 공간 속에 쌓아 돌무지와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봉황대, 대릉원 일대 주요 고분들과 쪽샘지구의 44호분을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 44호분 위로 닫집을 씌워놓은 모습이 보인다.
연구소는 7일 이런 내용을 담은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발굴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주검 머리맡의 부장궤 유물층은 위쪽 겉층만 걷어냈을 뿐이다. 심현철 연구원은 “비단벌레 물방울 장식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물에 붙은 것인지 아직 모른다. 부장궤 유물층 아래를 파헤치면 전혀 보지 못했던 미지의 유물이 쏟아질 수 있다”고 했다. 44호분의 수수께끼를 풀 단서가 새롭게 나올지도 관심거리다. 조사 성과는 이날 연구소 유튜브의 온라인 현장 설명회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공개됐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덤 주인의 오른쪽 귀에 걸었던 금귀걸이의 출토 모습.
주검 자리 출토 현장의 일부 모습. T(티) 자 모양 투조 장식과 솔 모양 장식물 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