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타계한 김창열 작가의 1977년 작 <물방울>(161.5×115.7㎝). 지난달 23일 열린 서울옥션의 올해 첫 경매에 시작가 4억8000만원에 나와 응찰자들의 경합 끝에 10억4000만원에 낙찰되면서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솔직히 말해 지금 사회나 문화판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요즘 서울 강남북 화랑가를 오가며 전시 기획과 거래 상담을 해온 40대 딜러 ㄱ씨가 털어놓은 말이다. 팬데믹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하면서 연극·뮤지컬을 비롯한 공연계와 관광업계, 자영업계는 존폐를 걱정하는 한계상황에 이르렀으나 미술품을 사고파는 화랑과 경매업계는 새봄에 접어들면서 작품 매매가 도드라진 오름세를 띠면서 투자자가 몰리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큰손과 새 얼굴의 젊은 30~40대 컬렉터들이 경매장 구매에 몰려드는 양상이 최근 경매시장에서 나타나 경매업계와 화랑업자들은 쾌재를 부르며 고객 유치에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 사설 기관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지난달 올해 시장이 호황 경기로 진입하는 입구에 와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지난해 봄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렸던 화랑미술제 현장. 작품을 내건 각 화랑의 부스들 사이 통로를 관객들이 감상하면서 지나가고 있다. 화랑업자들은 코로나 확산 사태로 움츠러들었던 미술품 판매가 올해 화랑미술제를 계기로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기류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지난달 23일 열린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의 올해 첫 정기 경매였다. 이날 서울옥션 경매 현장은 예약 신청자가 넘쳐 자리를 못 잡은 이들이 많았다는 뒷말이 나올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지난 1월 작고한 대가 김창열의 1977년 작 <물방울>이 시작가 4억8000만원에 나와 열띤 경합 끝에 두 배 이상의 최고가인 10억4000만원에 낙찰됐다. 한국화 대가인 청전 이상범의 <귀로>도 1억원으로 시작해 4억원 넘는 값에 거래돼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고, 무속 그림으로 유명한 채색화 대가 박생광의 작품 7점도 모두 낙찰됐다. 이날 전체 거래 규모는 110억원으로 2년여 만에 100억원대로 복귀했고, 낙찰률 90.4%도 2018년 이래 3년 만에 나온 수치였다. 서울옥션의 최윤석 이사는 “경매장을 찾고 낙찰받은 컬렉터들의 상당수가 30~40대 새 컬렉터들이었다는 점이 고무적”이라며 “김창열의 최고가 작품을 포함해 그의 작품 8점을 구매한 컬렉터 중 절반이 신규 컬렉터였다”고 전했다.
17일 봄 경매를 여는 경쟁사 케이옥션도 김창열, 김환기, 박서보 등 블루칩 작가들의 명품을 다수 내놓으면서 경매 시작가 합산액만 17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거래를 준비 중이다. 들뜬 분위기를 업고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39회 화랑미술제도 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해 7일까지 열릴 예정이어서 작품 경기가 살아나리란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지난해 봄 코엑스에서 열린 화랑미술제 참여 부스들을 내려다본 모습. 화랑업자들은 코로나 확산 사태로 움츠러들었던 화랑 시장의 미술품 판매가 올해 화랑미술제를 계기로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경매시장 매출 총액은 1000억원을 겨우 넘겨 지난 5년 사이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고 거래가 코로나 사태로 위축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옥션, 케이옥션 등의 경매업체와 주요 화랑, 국내 진출한 외국계 화랑들은 온라인상의 작품 사이트(뷰잉룸)와 온라인 장터, 인터넷 경매 등을 개설해 주요 컬렉터들이 명품과 고가 작품을 구입하는 흐름을 계속 이어갔다. 특히 엠제트 세대로 불리는 젊은 컬렉터들이 온라인 경매나 뷰잉룸을 통해 시장 상황을 학습하고 지난달 서울옥션 경매를 통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게 업계 일각의 견해다.
미술계에선 부동산에서 막히고 주식시장에서 부풀어 오른 유동자금이 안전자산인 미술품으로 쏠리는 것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기존 컬렉터보다 한참 어린 20~40대 컬렉터들이 투자 대체재로서 미술품에 집중 투자하는 구매심리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화랑협회가 4~7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여는 ‘2021 화랑미술제’ 포스터.
시장 상황의 호전에 이어 변수로 등장한 것이 상속세 등의 세금을 미술품으로 낼 수 있게 하는 물납제다. 지난 연말 이건희 삼성 회장의 사후 삼성가가 그의 막대한 개인 미술품 컬렉션에 대해 법무법인 김앤장의 총괄 아래 화랑협회 등 3개 단체에 감정평가 용역을 맡기면서 물납제 논의는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화랑협회 등에서 군불을 지피는 물납제 논의는 아직 법제화를 위한 국회 논의가 본격화하지 않아 법이 만들어지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국내 미술계가 지금 당장 시행하기에는 몇가지 현실적인 한계도 안고 있어 논의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러 단체로 갈라져 감정 이권을 놓고 갈등과 내홍을 거듭해온 시장 전문가들의 작품 감정 능력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깊기 때문이다. 최근 시장 오름세를 주도하는 신규 컬렉터들도 청년 작가군의 새 작품 발굴보다 기존 원로 작고 인기 작가들에 더욱 몰입하는 구매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시장의 확장성을 끌어낼지는 회의적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국화랑협회·서울옥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