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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호 사건 환기시키지만…남 주인공 ‘응징’에 가려진 것들

등록 2021-05-07 18:14수정 2021-05-08 02:32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SBS 드라마 ‘모범택시’

“울지 마 지워줄게, 죽지 마 지켜줄게, 우리가 싸워줄게.” 2018년 여름, 아스팔트 위의 여성들이 쏟아낸 구호다. 웹하드 카르텔이 폭로되고 양진호는 감옥에 갔으니 끝난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양진호는 폭행 등의 혐의로 얼마 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을 뿐, 웹하드 카르텔에 대해서는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는 근절되었나. 2019년 ‘버닝썬’ 사건이 터지고, 2020년에는 ‘엔(n)번방’ 사건이 터졌다. 소라넷부터 엔번방까지, 성착취물은 플랫폼만 달리하여 여전히 공유된다.

드라마 <모범택시>(SBS)의 인기가 뜨겁다. 동명 웹툰이 원작이며, 법이 처벌하지 못한 악인들을 응징하는 액션물이다. ‘복수 대행 서비스’라는 설정은 만화적이지만, 실제 사건을 다루기에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재단의 대표이자 택시회사 사장인 장성철(김의성)의 집 지하에는 비밀 기지가 있다. 특수부대 출신 김도기(이제훈)를 비롯한 요원들이 범죄 피해자들에게 특별서비스를 제공한다.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

언뜻 <배트맨>이 연상된다. 범죄로 부모를 잃은 재벌이 ‘어둠의 기사’가 되어 직접 악을 응징하지 않던가. <모범택시>에서 범죄로 부모를 잃은 장성철과 김도기는 배트맨과 앨프리드 집사의 역할을 다소 다르게 나누어 갖는다. 고든 형사에 해당하는 역할도 있다. 원작 웹툰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하나(이솜)는 법의 테두리를 답답하게 여기는 정의로운 검사다. 지금은 김도기를 뒤쫓으며 사건을 설거지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곧 김도기와 공조하게 될 것 같다.

법을 대신해 악을 응징하며 공분과 카타르시스를 나누는 드라마에서 어떤 사건을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드라마는 8회 동안 장애인 착취, 학교폭력. 웹하드 카르텔 등을 다루었고, 보이스피싱 사건이 예고되어 있다. 과거 영화 <공공의 적>에서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패륜아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약자를 괴롭히는 악당에게 주목하고, 개인의 성품보다 착취와 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드라마는 실제 사건을 재연극 수준으로 유사하게 그린다. 조두순과 조도철, 양진호와 박양진처럼 실제 인물의 이름을 연상하게 하고, 공개된 실제 화면과 유사하게 장면을 연출한다. 양진호의 퇴직 직원에 대한 폭행에서 사건이 촉발되고, 내부고발자에 의해 악행이 폭로되는 과정도 그대로다. 하다못해 머리 염색이나 동물 학대 같은 괴상한 조직문화까지 그대로 따왔다. 이런 극사실적인 재연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궁금한 이야기 와이(Y)>를 만들었던 박준우 피디가 <닥터 탐정>에 이어 두번째로 도전한 드라마가 <모범택시>라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흥미롭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조건만 판타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실화를 재연해 고발을 수행하겠다는 르포르타주의 의욕이 과하게 감지된다. 고구마와 사이다를 오가는 감정의 착취와 묘사의 선정성은 종종 시청자를 지치게 만든다. 특히 장애인 착취를 굳이 다 보여주어야 했을까. 재현의 윤리와 미학을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 사건을 재연극처럼 극화할 때 기대할 수 있는 효과와 우려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일단 사건을 환기하는 효과가 크다. 양진호 사건은 웹하드 업체와 불법 촬영물을 대량으로 올리는 자, 불법 검색 목록을 차단하는 필터링 업체, 돈을 받고 동영상을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가 모두 한통속이었다는 끔찍한 진실을 폭로한다. 나아가 웹하드 업체가 자체적으로 필터링하도록 느슨하게 입법한 국회나, 단속하지 못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영상물등급위원회, 압수수색이 번번이 허탕 치도록 정보를 흘린 경찰, 기소된 양진호를 변호하는 호화 변호인단, 양진호와 인맥이 닿는 정치권의 진보 인사들의 이름까지 다시 언급되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화끈한 환상에 기대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 실제 싸움은 김도기와 같은 남성 영웅의 몸싸움이 아니었다. 2015년 소라넷 폐쇄부터 평범한 여성들이 정신적 고통과 악성 댓글에 시달려가며 공론화 작업을 해나간 것이다. 피해자의 삶을 파괴하는 성범죄물을 ‘국산 야동’이니 ’몰카’니 장난처럼 부르던 야만의 시대에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정초한 것도 젊은 여성들이다. 2018년 혜화역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도 주류사회는 ‘원한’이니 ‘남성혐오 세력에 의한 시위’로 간주하며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극 중 안고은(표예진)은 언니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손톱이 닳도록 동영상을 지우다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회복한 뒤 마침내 서버를 향해 돌진한다. 안고은은 자매애를 통해 피해자와 연대한 평범한 다수 여성을 대변한다. 그렇게 미친 듯이 싸운 결과 2020년 드디어 웹하드 업체의 불법촬영물 삭제 의무가 강화되었다. “악에게 지지 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성경 말씀은 김도기의 화끈한 액션으로 악인을 처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꾸준한 연대로 악한 현실을 바꾸어내라는 뜻이다. 김도기의 응징을 열망할 때, 모범택시가 없는 현실에서 평범한 우리는 무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고은이 되어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싸울 수 있다. 다행히 젊은 여성들은 백마 탄 초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서울시 보궐선거에서 20대 여성의 15%가 기타 군소 후보를 찍었다는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드라마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새겨야 할 말은 ‘현실은 더디고 환상은 쉽다’이다. 양진호 한명을 폭사시키는 안일한 정의가 아니라, 불법 촬영물을 보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더딘 정의를 꿈꾸어야 한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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