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사신기
2007 드라마 ‘6가지 흐름’
드라마를 보면 한해 방송 트렌드가 보인다. <하얀거탑> <태왕사신기>까지 전문직 드라마와 퓨전 사극이 어깨를 나란히 한 2007년 티브이는 드라마의 향연이었다. 미국 드라마의 대중화 바람으로 ‘데이편성’이 생기고, 형식과 소재면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이 쏟아졌다. 다양한 사극으로 텔레비전 앞에 중장년층을 모으기도 했다.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 든 대표적인 드라마들로 2007년 방송가의 유행과 변화를 짚어봤다.
젊고 섹시한 왕들의 전쟁 = <주몽> <연개소문> 등 2006년 안방극장이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이 득세했다면 올해는 조선 시대 회귀가 돋보였다. 사극 연출의 대가인 <여인천하>의 김재형, <대장금>의 이병훈 피디가 동시에 들고 나온 <왕과 나> <이산>은 지금도 박빙의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여기에 460억 제작비가 든 초대형 퓨전 사극 <태왕사신기>가 합세해 사극 천하를 이뤘다. 김종학·송지나·배용준이라는 스타급 제작진과 출연진에 걸맞게 <태왕사신기>는 국내외 안팎으로 관심을 모으며 30%대 시청률을 올렸고, 그 인기만큼이나 호된 질책도 받았다. 특히 올해는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이산> <한성별곡-정>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 등에서 개혁 군주 ‘정조’가 이상적인 지도자상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표현이 자유로운 케이블로 넘어가면 역사에 상상력이 가미된 퓨전 사극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한국판 시에스아이(CSI)라고 불린 <별순검>, 섹시 사극 <메디컬기방 영화관> 등이 좋은 평가를 얻었다.
‘내 남자의 여자’들 홀로서다=드라마 속 여자들이 솔직하고 당당해졌다. 여전히 진부한 불륜 코드가 다뤄졌지만 그 안에서도 변화가 엿보인다. <내 남자의 여자>는 화영과 지수가 보수적 가부장제에 순응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택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착한 아내와 불륜녀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그리기보다 피해의식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과정도 세심하게 담았다. 주체적인 여성상은 30대 미혼 여성을 다룬 드라마로도 이어졌다. 외모 지상주의가 만연한 비뚤어진 사회에서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현실적인 직장 여성 ‘영애’(<막돼먹은 영애씨>)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자아 성취를 위해 애쓰다 결국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소극적 모습으로 변하던 예전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한발 더 나아가 결혼은 하지 않고 스스로 원해서 아이만 낳아 기르는 비혼모(<불량커플> 김당자)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알파 걸’의 등장 등 변화된 사회상이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도 좀 더 현실적이고 진취적으로 바꾼 것이다.
‘하얀거탑’ 속 남자들=1월에 시작한 <하얀거탑>은 2007년 방송 트렌드를 결정짓는 초석이 됐다. <종합병원> 이후 10년 만에 병원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의 성공으로 <외과의사 봉달희> <뉴하트> 등 의학 드라마들이 줄을 이었다.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를 벗어나 조직과 개인의 속성을 파헤친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최도영의 눈으로 내부 고발자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토론이 인터넷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의학드라마 최초로 400평 규모의 병원 세트장을 지어 전문직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김창완, 선악의 갈림길에서 선 내면 연기를 보여준 이정길 등 중견배우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액션 누아르 <개와 늑대의 시간>같은 장르 드라마 탄생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석호필‘ 종일방송 = <프리즌 브레이크> <시에스아이> <그레이 아나토미> 등 미국 드라마(미드)가 ‘열풍’을 넘어 ‘대중화’ 바람을 탔다. 지난 3월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석호필’(웬트워스 밀러)의 방한으로 미드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더욱 거세졌다. 인터넷 미드 동호회와 케이블 방송을 통해 마니아들 중심으로 팬들을 형성하던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미드를 내려받아 보는 미드 애청자들의 시청 패턴은 방송사의 ‘데이 편성’으로 이어졌다. 데이 편성이 시청률 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자 이것을 본따 케이블 채널에서는 <내 남자의 여자> <커피 프린스 1호점> 등도 데이 편성해 눈길을 끌었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으로 침체기를 걷던 시트콤이 기지개를 켰다. <김치 치즈 스마일> <못말리는 결혼> 같은 가족 시트콤이 자리잡았다. 시트콤은 웃기면 그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미스터리·멜로·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해 드라마와 시트콤의 경계를 허물었다. 일일시트콤 최초로 스튜디오 카메라의 비중을 줄이고 이엔지 카메라를 60%로 끌어올려 웰메이드를 지향한 형식도 돋보였다. <…하이킥> 이후 시트콤은 저비용 고효율 장르라는 방송사 내부 인식도 달라졌다. <김치 치즈 스마일> 전진수 피디는 무엇보다 “시트콤도 일일드라마에 견주어도 승산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보여준 점이 돋보인다”고 했다. 문화방송은 ‘일일드라마 뒤 뉴스데스크’라는 편성 공식을 깨고 <…하이킥>을 프라임타임(오후 8시20분)에 배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소재와 형식 ‘무한도전’=소재와 형식에서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나왔다. 개성있는 캐릭터가 살아있던 <메리대구 공방전> <얼렁뚱땅 흥신소>는 시즌제로 만들어달라는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았다. 청소년 드라마인 <달려라 고등어>를 시작으로 이모티콘, 말풍선 같은 만화적인 기법이 드라마의 참신선을 높이기도 했다. <옥션하우스>처럼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시즌제 드라마’와 에이즈, 사채업자, 사이코메트리 등의 독특한 소재를 사용한 <고맙습니다> <쩐의 전쟁> <마왕>도 드라마의 소재와 형식의 지평을 넓히며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았다.
남지은, 허윤희, 김미영 기자 myviollet@hani.co.kr
내 남자의 여자
하얀거탑
석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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