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밤 방송된 <낭독의 발견> 마지막회의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토요판] 최성진의 오프라인 TV
‘온몸으로 책과의 만남’ 시도한
‘낭독의 발견’ 경영논리에 폐지
‘온몸으로 책과의 만남’ 시도한
‘낭독의 발견’ 경영논리에 폐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눈을 보는 동안 잎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아카시아꽃이 지는구나!’ 잎싹의 눈에는 흩날리는 눈발이 마치 아카시아 꽃잎처럼 보였다. 떨어지는 꽃잎을 온몸으로 맞고 싶어서 잎싹은 날개를 활짝 벌렸다. 향기를 맡고 싶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았다.”
오성윤 감독은 자신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한 대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듯 투박한 그의 목소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과 묘한 앙상블을 이뤘다. 방청객은 가만히 눈을 감고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빠져들었다. ‘잎싹’(암탉)이 하얀 눈밭 위에서 날개를 여는 장면이 펼쳐졌다. 지난 23일 밤 12시35분 <한국방송>(KBS)의 <낭독의 발견> 마지막회는 그렇게 시작했다.
잊혀지는 글귀에 대한 추억을 낭독 형식으로 되살려 시청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던 <낭독…>이 이날 388회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회 <낭독…>에서는 애니메이션 <…암탉>의 오성윤 감독과 애니메이션 속에서 맛깔스런 목소리 연기를 펼친 영화배우 박철민, 성우 김상현 등이 함께 출연했다.
시청자가 <낭독…>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11월5일 <티브이 문화지대>의 한 코너를 통해서였다. 단순히 보고 듣는 감각을 뛰어넘어 낭독으로 느끼는 ‘제3의 감각’을 통해 온몸으로 책과 만나는 방식을 제안하겠다는 것이 프로그램 취지였다. 그동안 다뤄왔던 소재도 시와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은 물론 노랫말과 편지글, 사진집, 명언 등 우리 삶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텍스트를 두루 아울렀다. 이를테면 23일 방송에서 소개된 시 ‘비광’도 훌륭한 낭독 대상이었다. 배우 박철민은 연극판에서 ‘비광’ 같은 존재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말하며 이 시를 낭독했다.
“나는 비광/ ‘섯다’에는 끼지도 못하고/ 고스톱에는 광 대접 못 받는 미운오리새끼// 나는 비광/ 광임에도 존재감 없는 비운의 광/ 차라리 내 막내 비쌍피가 더 인기 많아라// 하지만 그대/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오/ 그대가 광박 위기를 맞을 때 지켜주는 것은 나 비광이요/ 그대의 오광 영광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은 나 비광인 것을// 나는 비광/ 없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슬픈 광”
햇수로 9년째 다양한 책과 다양한 삶을 함께 읽어온 <낭독…>이 문을 닫는 이유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영상의 논리 때문이었다. 임혜선 담당 피디는 24일 “독한 언어로 독기 품은 현실을 말하는 프로그램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낭독…>을 통해 첫사랑에게 품었던 두근거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함, 이런 정서를 전달하고자 했다”며 “단순히 책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문학적 예술프로그램으로서의 <낭독…>의 가치를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채 프로그램 폐지 통보를 접했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밝혔다. 프로그램 폐지에 대한 시청자의 아쉬움도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낭독이 끝난 24일 새벽 류아무개씨는 <낭독…>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목요일 밤이면 이 조용한 시간, 낭독에 귀기울이는 이 시간이 제게 참 소중했다”며 “프로그램 마무리 자막에 깜짝 놀라 들어와봤는데 너무 아쉽고 슬프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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