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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어제의 패배를 거울로 오늘의 승리를 꿈꾸다

등록 2013-10-25 19:24수정 2015-10-23 14:41

최근 시작한 티브이엔 월화드라마 <빠스껫볼>은 <추노>의 곽정환 감독 작품으로 관심을 모은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질곡의 역사를 몸으로 이겨낸 청춘들의 이야기다. <추노>가 방영되던 2010년 3월의 곽정환 감독.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최근 시작한 티브이엔 월화드라마 <빠스껫볼>은 <추노>의 곽정환 감독 작품으로 관심을 모은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질곡의 역사를 몸으로 이겨낸 청춘들의 이야기다. <추노>가 방영되던 2010년 3월의 곽정환 감독.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래도 이번엔 적어도 20세기네요.” 곽정환 피디(PD)의 신작 <티브이엔>(tvN) <빠스껫볼>을 어떻게 보았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나는 농담처럼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방송>(KBS) <한성별곡-정>(2007)과 <2008 전설의 고향> ‘구미호’(2008), <추노>(2010)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대극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곽정환 피디는 시대극 참 좋아하네요.” 상대의 적당한 맞장구. 우리는 곽정환이 조선을 배경으로 그려낸 세 편의 비극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야, 내가 곽정환이 현대를 그렸던 작품 <도망자 플랜비>(2010)를 까맣게 잊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긴 하다. <한성별곡-정>은 시청률은 안 나왔으되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은 명작이었고, <추노>는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품으로 제작진조차 ‘10년 안에 다시 나오기 힘든 작품’이라 평할 정도였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놓친 <도망자 플랜비>에 비하면, 이 두 편의 조선 시대극은 너무나도 근사한 이력 아닌가.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역사의 가장 치열한 순간을 배경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꿈을 지닌 개인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집중했던 작품이다.

곽정환은 시청자들을 정치적으로 가장 어둡고 격렬한 시기로 데려가곤 한다. <한성별곡-정>은 개혁군주인 정조가 개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생을 은한 18세기로 돌아가, 궁 안에 고독한 군주와 서얼, 역도의 자식과 천민 출신 상인을 한자리에 모은다. 그런가 하면 <추노>는 장안에는 왕이 제 아들을 겁내 죽였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고, 백성의 절반은 노비로 몰락해 간신히 생을 부지하던 암흑의 시대, 인조 연간을 파헤친다.

사극이나 시대극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는 하지만, 곽정환은 과거의 이야기를 빗대어 오늘날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능하다. 참여정부 말기에 나온 작품인 <한성별곡-정>은 주변의 반대와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젊은 개혁군주의 이야기를 다뤘고, 이명박 정부 3년 차에 나온 <추노>는 부패한 국가 권력에 대한 분노와 파탄이 난 민초들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화성으로 수도를 천도하겠다는 왕의 말에 북촌 집값이 떨어지고 상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대부들의 모습이나, 생의 목표를 잃은 채 돈을 좇아 파락호처럼 살아가는 추노꾼들의 모습은 굳이 긴 설명 없이도 방영 당시의 정치 상황과 조우했다.

<추노>가 끝날 무렵, 곽정환은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추노>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 명쾌하다.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가 과연 이 역사를 조금이라도 다시 새로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략)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일상성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각을 하는 순간 시대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거다.” 메시지는 티브이를 보고 있던 오늘날의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한성별곡-정’ ‘추노’ 만든 곽정환 피디
해방기 그린 tvN ‘빠스껫볼’로 귀환

역사 속 승리한 순간의 짜릿함 대신
실패의 기록으로 새로운 세상 꿈꿔

하지만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서야 예정된 패배를 피할 도리는 없다. <추노>의 사내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조선의 17대 왕은 효종이고, <한성별곡-정>의 주인공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노력해도 정조가 꿈꾸던 조선은 오지 않는다. 역사 속 승리의 순간을 찾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는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다른 사극들 틈바구니에서, 곽정환은 굳이 질 것이 뻔한 정조와 인조의 시간을 찾아가 패인을 분석하고 질문을 던진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꿈과 선의를 품은 자들은 왜 실패한 것일까.’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충실한 자답처럼, 곽정환은 선한 인물들이 그 의도와는 다르게 파국을 불러오는 장면들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한성별곡-정>의 양만오(이천희)는 사대부의 돈으로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거상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권을 장악해 사치품의 공급을 독점해야 하고, 거기서 남은 이문으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싸게 공급해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 달리다 보니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사대부들을 돕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역적 모의에 휘말린다. 왕(안내상)은 시전의 독점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이 자립을 할 기회를 열어주고자 하지만, 독점 자본이 되어야 하는 양만오는 이러한 왕의 정책에 맞서 물건 값을 담합해 올린다. 곡식을 사지 못해 굶주려 쓰러져 가는 백성들을 눈앞에 두고도, 양만오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한다.

<추노>는 또 어떤가? ‘노비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며 총칼을 들고 일어난 노비들의 비밀 결사 ‘노비당’은 야음을 틈타 악독한 지주들을 죽이고 다니지만, 사실은 조정 신료와 왕의 장기말이 되어 철저히 이용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쓸모가 다하자 노비당을 이끌던 ‘그분’(박기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노비당원들을 몰살시킨다. 곽정환이 그린 조선에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의만으로 승리하는 꿈같은 일은 없었다.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치열하게 충돌하고, 한계에 봉착한 인물들은 덧없이 쓰러져 간다.

그러나 곽정환은 단순히 냉정하게 실패를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성별곡-정>의 마지막 장면은 기녀 월향(도지원)이 뱃속에 든 아이에게 제 아비가 꿈꿨던 조선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추노>의 노비 업복(공형진)은 자신을 나무라던 동료 노비에게 부패한 고관대작들을 백주대낮에 쏘아 죽이고 관군의 손에 잡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 신념과 의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역사의 변혁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이들이 피고 지는 가운데 천천히 이루어졌다. 곽정환은 소망과 의지가 꾸준히 전승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기어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전망을 남긴다.

그런데 조선을 벗어나 ‘어제의 패배’를 그리는 대신 ‘오늘의 승리’를 상상하는 순간, 곽정환의 세계는 현실감을 잃는다. 아버지 세대가 잘못 끼운 단추들을 자식 세대인 지우(정지훈)와 진이(이나영)가 고쳐 끼우는 내용의 첩보액션 <도망자 플랜비>는 부패한 거대 권력에 맞서 작은 승리를 쟁취하는 승리의 서사였다. 패배가 예정된 역사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추노>에서 호흡을 맞췄던 곽정환과 천성일 작가는, <도망자 플랜비>의 주인공들에게 최첨단 첩보 장비와 빼어난 무술 실력, 전세계에 연결된 네트워크를 쥐여준다. 막강한 권력자들과 맞서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라고.

그러나 그 승리는 우리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승리가 아니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멋지게 미션을 수행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반세기 넘게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짓밟으며 돌진해온 부패 권력과의 싸움이라는 중심 소재와 쉬 어울리지 못했다. <도망자 플랜비>는 승리의 과정을 다루느라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이들의 뜨거운 열망을 담아내지 못했고, 끝내 나이브한 첩보액션물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작은 승리라도 거두는 건, 최첨단 첩보 장비가 난무하는 허구의 세계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처럼. 현실감이 넘치는 패배를 그려냈던 피디가 그린 비현실적인 승리는 평단과 시청자 모두에게서 ‘실망’이란 반응을 끌어내는 데 그쳤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오늘의 승리를 그리려다 실패한 곽정환이, <빠스껫볼>에서 1940년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선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역사의 격랑 앞에서 가치관은 붕괴되고, 한번도 독립국가로서의 ‘조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식민지 청년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비틀거린다. 친일과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모순이 태동한 시대를 다루면서, 곽정환은 배짱 좋게 “그런 논쟁적인 부분이 어쩌면 매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는 현대 사회와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매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패와 좌절의 기록을 되짚어 오늘날을 무사히 건너는 것인지 모른다. 그걸 가장 잘할 줄 아는 피디가 돌아왔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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