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는 화가 난 새 ‘앵그리 버드’나 사람이 아닌 ‘갸루상’ 등 과장된 캐릭터를 잘 살리는 개그맨이다. 그런 그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인간의 조건>에서는 수줍은 인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국방송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현대인에게 익숙한 일상을 뒤흔들어 놓는 게 <한국방송>(KBS) 토요 예능 <인간의 조건>의 매력이라고는 하나, 이번 미션은 조금 심했다 싶었다. 바로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기 일쑤인 도시인들, 그것도 연예인 여섯명에게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아가기’라는 미션을 던져주다니 말이다. 과연 몇몇은 쭈뼛거렸고, 누군가는 “지금까지 했던 미션 중 가장 어려운 미션”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물론 넉살 좋고 붙임성이 뛰어난 김준호는 생판 남의 집에 들어가 인사도 하고 얼굴도 트더니 밥도 잘 얻어먹고 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박성호가 먼저 나서서 ‘동네 유치원에 가서 일일 교사를 해주고 점심을 얻어먹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긴장을 감춘답시고 흥겹게 춤을 춰가며 유치원 보육교사에게 일일 교사 자리를 부탁하는 박성호를 보다가, 문득 그 유치원이 제법 낯익은 유치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방송 목록을 뒤져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1년 전 <인간의 조건>이 아직 정규 편성이 되기 전 ‘휴대폰, 인터넷, 티브이 없이 1주일 살아보기’ 미션을 받았던 파일럿 방송에서 박성호는 이 유치원에 들어가 전화를 빌려 쓴 적이 있었다. 딱 1년 만에 같은 유치원을 찾아간 박성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1년 전 박성호는 정말 가장 뜨거운 코미디언이었다.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서 선보인 ‘갸루상’ 캐릭터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갸루상’ 캐릭터를 살려 디지털 싱글 앨범까지 발매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2012년의 박성호는 <개그콘서트>에서 가장 주목받는 코미디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박성호가 아닌 무대 아래의 박성호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데뷔한 지 15년이나 되었어도, 독한 화장을 지우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맨 얼굴이 어떤지는 알려진 것이 없는 코미디언이었던 셈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나면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연예인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이상할 일은 아니다. 워낙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일하는 순간이 아닐 때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 얼굴이 널리 알려진 연예인들은 혼자 길을 걷거나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는 것조차 일의 연장선상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유명한 사람을 보면 아는 체하고 싶고, 사인받고 사진 찍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심리니까.
더군다나 코미디언의 경우 가수나 배우에 비해 무대 위 캐릭터의 이미지로만 굳어지기 더 쉽다. 배우도 타입 캐스팅의 덫에 걸리기도 하고, 가수도 비슷한 이미지로만 소비되다가 몰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강한 유행어와 신체적 특징 따위를 결합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자신을 빠르고 세게 각인시켜야 하는 코미디언들은 무대 위의 캐릭터 안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밥을 먹다 말고 생면부지 남으로부터 다짜고짜 ‘웃겨 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는 코미디언들의 에피소드는 얼마나 많은가.
박성호 또한 그런 직업의 딜레마와 대중의 기대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코미디언으로 사는 동안엔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느라 10년이 넘는 아버지의 투병에도 울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런 지경이었으니, 박성호가 일과 자신의 삶을 되도록이면 칼같이 구분하려 했던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무대 밑 박성호에 대한 소문이 전혀 안 도는 것까진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은근 시중에도 알려진 게 많았다. 사람이 짠돌이라더라, 과하게 개인주의적이라더라, 후배가 낸 아이디어에 숟가락을 얹어서 버틴다더라 등등 별로 안 알려졌어도 좋았을 소문들만 무성하게 돌아다녔다. 심지어 최효종은 박성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신을 두고 ‘오이엠(주문자상표부착생산) 개그맨’이라는 농담을 하고, 김준호는 자신의 캐릭터를 빼앗아 간 박성호에게 오랜 시간 원망을 품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박성호는 자신의 그런 행보를 농담거리로 삼으면 삼았지,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토크쇼 등에 나온 후배들은 “박성호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잘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 후배들이 짜놓은 코너에 새 캐릭터를 들고 들어가 히트를 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과장과 와전을 거쳐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뒤늦게 해명을 해주곤 했으나, 좋지 않은 소문은 많은 경우 해명보다 더 빨리 번지고 더 오래 살아남는다. 박성호에 열광하는 이들만큼이나 그런 박성호를 내심 불편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1년 전 <인간의 조건> 파일럿 프로그램이 시작될 무렵, 다른 코미디언들에 비해 박성호는 유독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얼 버라이어티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김준호, 김준현이나 버라이어티 경력이 제법 되는 허경환, 젊은 피인 양상국과 정태호가 빠른 속도로 쇼에 적응하는 동안 박성호는 후배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자꾸만 겉돌았다. ‘일은 일이고 생활은 생활’이라고 딱 잘라 생각하던 내향적인 개인주의자 박성호는 후배들과의 합숙이 다소 불편해 보였고, 자신의 일상을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티브이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어서 서로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도 없는 상황, 다른 코미디언들이 서서히 서로와 이야기를 나누고 새삼스레 서로를 알아가는 와중에도 박성호는 뜬금없는 농담을 던지는 쪽을 선택했다.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노력이었겠으나 티브이 화면에는 그런 그를 더 황당하게 생각하는 후배들의 얼굴과 함께 ‘참 이상한 형’ 같은 자막이 뜨곤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지 않던 후배들과의 합숙, 유일하게 친하다고 생각하는 멤버는 <개그콘서트> 초창기부터 동고동락한 김준호였지만, 정작 김준호는 과거 자신이 원안을 냈던 ‘다중이’ 캐릭터를 동의도 없이 가져가 히트를 친 박성호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오해와 앙금을 풀기 위해 후배들이 부단히 노력한 끝에 박성호는 간신히 지나가는 투로나마 김준호에게 사과를 할 수 있었다. “이게 왜 사과까지 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일은 일이고 재능 있는 이들끼리 서로 경쟁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말하던 사람에겐 작지 않은 진전이었다. 물론 보는 쪽 입장에서는 그 하는 둥 마는 둥 장난처럼 이루어진 사과가 여전히 조금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쇼들은 사람을 바꾼다. <인간의 조건>처럼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고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는 종류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출연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때로는 변화하게도 만든다. 유재석은 <문화방송>(MBC)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더 박진감 있는 추격전을 위해 담배를 끊었고, 김태원은 한국방송 <해피 선데이-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면서 오랜 칩거를 풀고 암을 발견해 고쳤다. 그리고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주기를 꺼리던 박성호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멤버들과도 오래 대화하는 걸 꺼리던 박성호는 ‘시원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라’는 숙제를 받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숙소 근처 식당 주차요원을 찾아갔다. 자신의 맨 얼굴을 세상에 보이기 꺼리던 그는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카메라 앞에 노출했다. “일은 일, 생활은 생활”이라며 후배들과 깊은 친분을 쌓진 않던 그가 허경환의 손을 붙잡고 결혼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고, 종국엔 먼저 어린이집을 찾아가 일일 교사가 되어주겠노라 자청하는 지점까지, 한걸음 한걸음씩 자신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를 ‘후배 아이디어에 빨대를 꽂아 연명하는 코미디언’ 정도로만 여기던 사람들도 천천히 그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그렇게 크게 한바퀴를 돌아 같은 어린이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인간의 조건>의 1년이 흘렀다.
모든 연예인이 자신의 맨 얼굴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는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가끔, 어떤 맨 얼굴은 오랜 오해를 풀고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박성호는, 그리고 그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던 많은 이들은 운이 좋았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관련 영상] 서정민 이승한의 잉여싸롱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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