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진행자 교체와 타 부서 인사발령 등으로 <한국방송> 아나운서실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왼쪽부터 가애란, 김솔희, 서기철, 전인석, 조건진 아나운서. 한국방송 제공
[토요판] 뉴스분석 왜?
KBS 아나운서실 인사 파동
KBS 아나운서실 인사 파동
* 아나운새 : 아나운서+앵무새
▶ <한국방송>의 장수 인기프로그램인 <6시 내 고향>의 여자 진행자가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왜 바뀐 건지는 ‘며느리도 모른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축구 캐스터들인 서기철 아나운서, 전인석 아나운서는 브라질 월드컵을 두달 앞두고 갑자기 인재개발원과 편성국으로 인사가 났습니다. 도대체 한국방송 아나운서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대학교 때 학교방송국에 친구가 몇명 있었다. 피디(PD)와 아나운서들은 한편으론 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가끔 감정이 격해질 때면 피디들이 아나운서들에게 해서 꼭 큰 싸움으로 번지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아나운새”다. 듣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 팍 들어온다. 아나운서들이 써주는 대본을 ‘앵무새’처럼 읽기만 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러한가?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나운서는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주역이 된 지 오래다. 누가 진행을 맡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패가 좌우된다.
<한국방송>(KBS)이 아나운서를 대하는 태도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시작은 지난해 10월 불거진 <진품명품> 사태였다. 프로그램을 무난히 이끌어왔다고 평가받던 윤인구 아나운서가 갑자기 김동우 아나운서로 바뀌었다. 김창범 피디 등 제작진은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이뤄진 일이다. 당시 <진품명품> 제작진과 윤인구 아나운서가 진행자 교체 지시에 불복하며 녹화 파행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제작진은 모두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 조처됐고, 비제작부서인 방송문화연구소로 발령난 김창범 피디와 윤인구 아나운서에게 뒤늦게 ‘견책’ 징계가 내려지기도 했다.
‘전현무 영입 반대 피케팅’에 대로하다
그 뒤 한동안 조용했던 아나운서실은 최근 또다시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31일 회사가 <6시 내 고향>의 진행자인 가애란 아나운서를 신설되는 <좋은나라 운동본부> 진행자로 보내고, <6시 내 고향>에 김솔희 아나운서를 전격 투입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제작진에는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아나운서들과 교양국 피디들이 반발하는 사이 아나운서실에 또다시 ‘폭탄’이 떨어졌다. 2일 회사가 베테랑 아나운서 5명을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을 포함한 정기인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서기철, 조건진, 전인석 아나운서 등 고참 스포츠 캐스터들이 포함된 인사였다. 서 아나운서는 인재개발원, 조 아나운서는 시청자본부 총무국 수원센터운영부, 전 아나운서는 편성본부 편성국 등 아나운서와 전혀 관계없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선 고참 아나운서들의 인사발령은 감사원 지적사항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전진국 편성본부장도 봄 개편 프로그램 설명회에서 “아나운서 인사이동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보듯 고위 직급의 업무 성과에 대한 평가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지난달 28일 한국방송과 6개 자회사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며 ‘고위 직급(2직급) 이상 상위직의 비율이 계속 높아져 2012년 57.1%에 이르고, 관리직급과 1직급 중 무보직자가 59.7%에 이른다’고 방만한 경영 상황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에 인사발령이 난 고참 아나운서는 1직급이 4명, 2직급이 1명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전현무 사태’를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는 사람이 더 많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한국방송 관계자는 “아나운서실이 월드컵 중계 캐스터로 전현무 전 아나운서를 영입하려고 한 회사 방침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결국 좌초됐고, 이에 대한 괘씸죄로 이번 인사가 뒤따랐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이번 인사에서 서기철, 조건진, 전인석 등 이른바 ‘1진’ 스포츠 캐스터들이 대거 포함된 것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한국방송은 왜 “프리랜서 선언을 한 직원을 3년 내에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않는다”는 노사합의까지 어겨가며 전현무씨를 영입하려고 했을까? 전현무씨는 2012년 7월 한국방송을 그만두고 ‘프리 선언’을 했으니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한국방송은 지난 소치올림픽 시청률 경쟁에서 톡톡히 굴욕을 당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의 집계를 보면, 2월12일 이상화 선수의 스피드스케이팅 500m 1차 경주 시청률은 <문화방송>(MBC)이 31.6%, 한국방송이 24.3%를 차지했다. 시청률 격차가 7.3%에 이른다. 문화방송이 김성주라는 걸출한 스타 아나운서를 영입한 데 대응해 한국방송은 연예인 강호동씨를 해설로 배치하며 맞불을 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2월22일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시청률은 <에스비에스>(SBS)가 13.7%, 문화방송이 10.5%, 한국방송이 5.9%였다. 오랫동안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독점 중계해온 에스비에스는 물론 문화방송에마저 큰 차이로 뒤진 것이다.
엄청난 액수의 광고 전쟁이 벌어질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방송에 발등의 불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문화방송은 김성주 아나운서, 에스비에스는 배성재 아나운서라는 ‘회심의 카드’가 있지만 한국방송은 이에 비견될 만한 스타가 없다. 프리랜서 선언 전 여러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자랑해온 스타 아나운서인 전현무를 영입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올 만한 상황이다. 이는 아나운서협회와 노조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이들은 2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현무 월드컵 캐스터 기용반대 피케팅을 벌였고, 그 이후 전현무씨는 소속사를 통해 고사 입장을 밝혔다. KBS노조의 성명서를 보면 “길(환영) 사장이 (아나운서실의 반대에) 상당히 노했”으며 “그날 저녁, 아나운서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발령폭탄이 투하됐다”고 한다.
<진품명품> 사태 가라앉자마자
<6시 내 고향> 진행자 교체
뒤이어 고참 아나운서들도
상관없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전현무 영입 반대 괘씸죄일까
회사는 정기인사일 뿐이라지만
나간 아나운서는 새노조 가입자
바뀐 아나운서는 기존노조 대의원
원칙없는 일방적 인사에
아나운서와 피디들이 뿔났다
‘생방송 난입’ KBS노조 파업에 대한 실망감 전현무 영입을 반대한 것이 아나운서들의 밥그릇 챙기기 아니냐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기존 캐스터들에게 진행을 맡겼던 소치올림픽의 시청률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인사에서 편성팀으로 간 전인석 아나운서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스포츠 중계에서 선배들이 너무 후배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안팎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번에 축구 1진 2명(서기철, 전인석)이 한꺼번에 빠졌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스포츠 중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주 아나운서의 경우 원래 스포츠 채널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했고, 스포츠 중계 경험도 많다. 배성재 아나운서도 남아공 월드컵부터 오랫동안 축구를 맡았고,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통해 경륜도 쌓았다. 그런데 전현무 아나운서는 스포츠 중계 경험이 전혀 없다. 꾸준히 스포츠 캐스터를 키우려는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던 회사가 시청률에만 매달려 무리수를 두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변화가 필요했고, 감사원 지적사항을 반영한 인사라고 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우선 아나운서실의 무보직 1직급 중 일부에게만 인사발령이 났다는 점이다. 왜 누구는 인사가 나고 누구는 나지 않았느냐에 대한 질문에 한국방송은 입을 닫고 있다. 또 한국방송은 감사원의 방만경영 지적 이후 발간한 4일치 사보에서 “관리직급과 1직급에 있는 무보직자들은 각종 현업에 배치돼 숙련된 경험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우수한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후배들에게 축적된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그런데도, 보직이 없다는 이유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나운서실에는 해명과 전혀 다른 인사가 났다. 서기철, 조건진, 전인석 아나운서 등은 최근 소치올림픽에도 파견되는 등 계속 방송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사가 난 아나운서들이 무슨 특별한 보직을 받은 것도 아니다. 시청자본부 총무국 수원센터운영부로 발령난 조건진 아나운서는 “아직 특별히 할 일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여기 견학센터에서 안내를 맡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베테랑 아나운서가 견학 안내 일을 하는 것이 한국방송의 해명대로 “상위 직급의 비효율화를 막기 위해 이뤄진 인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새로 ‘신입직원’을 받은 부서장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무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이뤄진 인사였다. 이번 인사의 여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아나운서실에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11일 저녁 8시에는 비상총회도 열렸다. 아나운서실 관계자들은 “30년 가까이 방송 최일선에서 최선을 다했던 아나운서들을 사지로 쫓아낸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조건진 아나운서는 “예전에도 다른 부서로 가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미리 충분히 의사를 묻고 나서 이뤄졌다. 이번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한마디로 ‘멘붕’이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번 인사의 뒷배경은 결국 회사의 눈엣가시였던 ‘새노조’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팎의 분석이다. 한국방송에는 두개의 노조가 있다. 흔히 ‘구노조’ 또는 ‘1노조’로 불리는 기존 KBS노조와 ‘새노조’ 또는 ‘2노조’라 불리는 2010년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노조(새노조)다. 새노조는 ‘이병순 사장 체제에서 무너져가던 공영방송의 가치를 다시 살리겠다’며 출범했고, 이후 김인규, 길환영 사장에 이르기까지 회사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상태다. 젊은 피디와 기자들이 본부노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데 비하면 아나운서들은 상대적으로 가입률이 낮았다. 아나운서실에 소속된 108명 중 새노조원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변화는 최근에 생겼다. 2월28일에 아나운서 12명이 대거 새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늘었을까. 한 아나운서는 “지난해 12월 KBS노조 파업이 사실상 실패한 뒤 실망감이 커졌고, 아나운서들이 명분 없는 파업의 희생양이 됐다는 판단을 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KBS노조는 지난해 연말 ‘한국방송 사장 선임방식 변경, 임금 인상과 학자금 지원, 인력충원’이라는 등을 내걸고 열흘간이나 파업을 벌였다. 본사와 계열사 노조까지 모두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하지만 인력충원 외에 얻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 파업 도중 생방송을 하던 <생생정보통>의 스튜디오로 난입해 방송이 중단된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한국방송의 한 피디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생방송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방송사의 불문율인데 KBS노조가 이를 어겼다. 이 사건으로 스텝이 꼬인 KBS노조는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회사는 나름대로 새노조 가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운서들이 새노조에 가입하던 날 담당 부팀장들이 경위를 파악한다며 몇몇 아나운서를 개인적으로 불러 면담을 했는데, 상당수 아나운서들은 이를 “회유나 협박”으로 느꼈다. 한 아나운서는 면담 뒤 새노조 가입을 철회하기도 했다. 결국 12명이 새노조에 가입서류를 냈다. 새노조 조합원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번에 갑자기 <6시 내 고향>의 진행자 자리를 빼앗긴 가애란 아나운서는 이때 새노조에 가입했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가애란 아나운서 외에 새노조에 가입했던 또다른 아나운서도 별다른 이유 없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가애란 아나운서 대신 진행을 맡은 김솔희 아나운서는 새노조 소속이 아니다. 이번 조처가 새노조에 가입한 아나운서에 대한 일종의 경고 내지는 본보기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갑작스럽게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고참 아나운서들도 마찬가지다. 한 아나운서실 관계자는 “서기철 아나운서는 KBS노조 소속이고, 나머지 4명은 1직급이라 노조에 소속돼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새노조 조합원들과 친하게 지내고 새노조의 행보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다. 발령이 나지 않은 무보직 1직급 3명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방송 아나운서실 내부 분위기는 매우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실국장이 모여 엠시(MC)조정회의라는 실체도 모호한 기구를 가동시키고 이를 통해 진행자를 결정하는 현재 구조에 아나운서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새노조는 진행자 선정 등을 포함해 제작 자율성이 침해받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진품명품> 사태 이후 류현순 부사장 등이 ‘제작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진행자를 선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한 피디는 “진행자 선정은 제작 피디의 고유한 권한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것부터 하나씩 깨져나간다면 결국 방송 제작과정 전체에 회사의 입김이 들어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오훈 새노조 위원장은 “진행자의 일방적인 교체는 대표적인 제작 자율성 침해 문제이기 때문에 교양국 피디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대응책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6시 내 고향> 진행자 교체
뒤이어 고참 아나운서들도
상관없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전현무 영입 반대 괘씸죄일까
회사는 정기인사일 뿐이라지만
나간 아나운서는 새노조 가입자
바뀐 아나운서는 기존노조 대의원
원칙없는 일방적 인사에
아나운서와 피디들이 뿔났다
‘생방송 난입’ KBS노조 파업에 대한 실망감 전현무 영입을 반대한 것이 아나운서들의 밥그릇 챙기기 아니냐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기존 캐스터들에게 진행을 맡겼던 소치올림픽의 시청률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인사에서 편성팀으로 간 전인석 아나운서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스포츠 중계에서 선배들이 너무 후배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안팎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번에 축구 1진 2명(서기철, 전인석)이 한꺼번에 빠졌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스포츠 중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주 아나운서의 경우 원래 스포츠 채널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했고, 스포츠 중계 경험도 많다. 배성재 아나운서도 남아공 월드컵부터 오랫동안 축구를 맡았고,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통해 경륜도 쌓았다. 그런데 전현무 아나운서는 스포츠 중계 경험이 전혀 없다. 꾸준히 스포츠 캐스터를 키우려는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던 회사가 시청률에만 매달려 무리수를 두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변화가 필요했고, 감사원 지적사항을 반영한 인사라고 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우선 아나운서실의 무보직 1직급 중 일부에게만 인사발령이 났다는 점이다. 왜 누구는 인사가 나고 누구는 나지 않았느냐에 대한 질문에 한국방송은 입을 닫고 있다. 또 한국방송은 감사원의 방만경영 지적 이후 발간한 4일치 사보에서 “관리직급과 1직급에 있는 무보직자들은 각종 현업에 배치돼 숙련된 경험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우수한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후배들에게 축적된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그런데도, 보직이 없다는 이유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나운서실에는 해명과 전혀 다른 인사가 났다. 서기철, 조건진, 전인석 아나운서 등은 최근 소치올림픽에도 파견되는 등 계속 방송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사가 난 아나운서들이 무슨 특별한 보직을 받은 것도 아니다. 시청자본부 총무국 수원센터운영부로 발령난 조건진 아나운서는 “아직 특별히 할 일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여기 견학센터에서 안내를 맡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베테랑 아나운서가 견학 안내 일을 하는 것이 한국방송의 해명대로 “상위 직급의 비효율화를 막기 위해 이뤄진 인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새로 ‘신입직원’을 받은 부서장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무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이뤄진 인사였다. 이번 인사의 여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아나운서실에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11일 저녁 8시에는 비상총회도 열렸다. 아나운서실 관계자들은 “30년 가까이 방송 최일선에서 최선을 다했던 아나운서들을 사지로 쫓아낸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조건진 아나운서는 “예전에도 다른 부서로 가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미리 충분히 의사를 묻고 나서 이뤄졌다. 이번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한마디로 ‘멘붕’이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번 인사의 뒷배경은 결국 회사의 눈엣가시였던 ‘새노조’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팎의 분석이다. 한국방송에는 두개의 노조가 있다. 흔히 ‘구노조’ 또는 ‘1노조’로 불리는 기존 KBS노조와 ‘새노조’ 또는 ‘2노조’라 불리는 2010년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노조(새노조)다. 새노조는 ‘이병순 사장 체제에서 무너져가던 공영방송의 가치를 다시 살리겠다’며 출범했고, 이후 김인규, 길환영 사장에 이르기까지 회사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상태다. 젊은 피디와 기자들이 본부노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데 비하면 아나운서들은 상대적으로 가입률이 낮았다. 아나운서실에 소속된 108명 중 새노조원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변화는 최근에 생겼다. 2월28일에 아나운서 12명이 대거 새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늘었을까. 한 아나운서는 “지난해 12월 KBS노조 파업이 사실상 실패한 뒤 실망감이 커졌고, 아나운서들이 명분 없는 파업의 희생양이 됐다는 판단을 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KBS노조는 지난해 연말 ‘한국방송 사장 선임방식 변경, 임금 인상과 학자금 지원, 인력충원’이라는 등을 내걸고 열흘간이나 파업을 벌였다. 본사와 계열사 노조까지 모두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하지만 인력충원 외에 얻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 파업 도중 생방송을 하던 <생생정보통>의 스튜디오로 난입해 방송이 중단된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한국방송의 한 피디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생방송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방송사의 불문율인데 KBS노조가 이를 어겼다. 이 사건으로 스텝이 꼬인 KBS노조는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회사는 나름대로 새노조 가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운서들이 새노조에 가입하던 날 담당 부팀장들이 경위를 파악한다며 몇몇 아나운서를 개인적으로 불러 면담을 했는데, 상당수 아나운서들은 이를 “회유나 협박”으로 느꼈다. 한 아나운서는 면담 뒤 새노조 가입을 철회하기도 했다. 결국 12명이 새노조에 가입서류를 냈다. 새노조 조합원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번에 갑자기 <6시 내 고향>의 진행자 자리를 빼앗긴 가애란 아나운서는 이때 새노조에 가입했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가애란 아나운서 외에 새노조에 가입했던 또다른 아나운서도 별다른 이유 없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가애란 아나운서 대신 진행을 맡은 김솔희 아나운서는 새노조 소속이 아니다. 이번 조처가 새노조에 가입한 아나운서에 대한 일종의 경고 내지는 본보기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갑작스럽게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고참 아나운서들도 마찬가지다. 한 아나운서실 관계자는 “서기철 아나운서는 KBS노조 소속이고, 나머지 4명은 1직급이라 노조에 소속돼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새노조 조합원들과 친하게 지내고 새노조의 행보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다. 발령이 나지 않은 무보직 1직급 3명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방송 아나운서실 내부 분위기는 매우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실국장이 모여 엠시(MC)조정회의라는 실체도 모호한 기구를 가동시키고 이를 통해 진행자를 결정하는 현재 구조에 아나운서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새노조는 진행자 선정 등을 포함해 제작 자율성이 침해받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진품명품> 사태 이후 류현순 부사장 등이 ‘제작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진행자를 선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한 피디는 “진행자 선정은 제작 피디의 고유한 권한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것부터 하나씩 깨져나간다면 결국 방송 제작과정 전체에 회사의 입김이 들어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오훈 새노조 위원장은 “진행자의 일방적인 교체는 대표적인 제작 자율성 침해 문제이기 때문에 교양국 피디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대응책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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