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영화 <족구왕>(사진). 재기발랄하되 장르적인 재미는 담보하지 못한 흔한 독립영화이겠거니 생각하고 기대도 별로 안 하고 봤다. 영화를 보던 눈이 번쩍 뜨인 건 멋진 액션신이나 로맨틱한 키스신 때문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대사도 아닌, 한 조연 배우의 맥없는 대사.
“공무원 시험 준비해.”
이 대사 이후로 나는 ‘초’집중해서 영화를 봤다. 재작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 이후로 영화 본 뒤에 다른 사람들의 관람 후기를 찾아본 것도 이 영화가 처음이다. 내가 느낀 재미와 감동이 지나친 것인가 싶어서.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역을 하고 복학한 만섭은 캠퍼스 최고 퀸카 안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문제는 안나의 주변을 맴도는 축구 국가대표 출신의 훈남 강민. 어쩌다가 만섭과 강민은 1대 1 족구 대결을 벌이는데 만섭이 이긴다. 그 경기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지면서 캠퍼스에 난데없는 족구 열풍이 불어 닥친다. 취업난에 등록금 문제까지 짊어진 청춘들이 벌이는 한판 승부가 이 영화의 줄거리다.
어느 시대든 당대의 젊음을 그려내는 청춘영화가 있었다. 사실 시나리오 작가로서 내 입봉작도 청춘영화였다. 1999년에 개봉한 <질주>라는 영화였는데 당시 내 또래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의 세기말적 고민과 방황을 포착한 영화라는 제작사의 광고문구와 달리 흥행에는 참패를 맛봤다. 나 때문이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진정성도 완성도도 턱없이 부족한 시나리오였다.
<질주> 이전에도 이후에도 청춘영화는 많이도 나왔다. <족구왕>은 적어도 내가 본 수십 편의 청춘영화 중에서는 <트레인스포팅>과 함께 최고로 꼽고 싶다. 내가 제시하는 좋은 청춘영화의 네 가지 기준은 진정성, 에너지, 속도, 스타일이다. <트레인스포팅>이 속도와 스타일 면에서 최고의 청춘영화였다면 <족구왕>은 진정성과 에너지 면에서 최고다. 특히 진정성 면에서 방점을 찍는 대사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공무원 시험 준비해”다.
남자주인공 만섭의 같은 기숙사 방에 사는, 나이 많은 선배가 복학하고 들어온 만섭에게 심드렁하게 던지는 대사인데 이 대사는 영화 <족구왕>이 저항하는 대상, 우리 청춘이 갇혀있던 덫을 은유나 상징 없이 드러낸다.
언제부터 전문직,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업이 마치 젊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인 양 되어버렸을까? 대학의 서열화보다 더 슬픈 학과의 서열화가 자리 잡은 이유는 무얼까? 청춘들이여,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가? 반대로, 무엇이 그대들을 이토록 위협하는가? 다들 나처럼 걱정해주는 척, 미안한 척, 또는 한숨지으며 공허한 질문을 던질 때 족구왕은 용감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짓눌린 청춘들이여, 족구를 해라.
이렇게 훌륭한 대안은 처음 본다. 설마 이 글을 읽으면서 족구를 족구로 읽는 사람은 없겠지? 간단하게 사족을 달아본다. ‘족구=필요가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들.
그렇다. 비록 현실의 비정함은 외면할 수 없을 지라도, 가끔 족구를 하면 우리는 조금 더 여유롭고 조금 더 유쾌하고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족구 안에 길이 있을 때도 많다. 나 역시 재미로 쓰던 소설 덕분에, 재미로 모으던 음반 덕분에, 재미로 보던 영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청춘들이여. 오늘만큼은 힘내란 얘기 안 할게요. 오늘 하루는 힘 빼고 족구 할래요?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