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처음 방영되는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송곳>. 무노조 경영을 경영철학으로 삼은 삼성과 무관하지 않은 제이티비시에서 방영된다는 사실 때문에 드라마는 불편한 시선을 받고 있다. 제이티비시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최근 일이다. 솔로 앨범을 발표한 한 아이돌 가수에 대한 글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타임라인에 올라왔는데, 팬들은 좋다고 퍼 나르는 그 글의 제목이 나는 눈에 밟혔다. 아무개는 아이돌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니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라는 내용의 제목. 아이돌 가수는 노래를 못한다거나, 음악성이 없다거나, 아무튼 가수 일반에 비해 열등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문장 아닌가.
“이분이 이런 논조로 글을 쓰실 분이 아닌데” 하며 클릭해봤더니 과연 그런 뜻으로 쓴 글이 아니었다. 아마 편집 과정에서 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 만한 제목을 고민하던 이들이 달았을 제목이었으리라. 아주 많은 경우 글에 제목을 다는 것은 각 매체 편집부의 권한이고, 나 또한 몇년째 이 칼럼을 연재하며 직접 제목을 정한 일은 다섯번이 채 안 된다. 그러다 보면 가끔 필자가 의도한 글의 성격과는 조금 결이 다른 제목이 나올 때도 있다. 음, 해당 매체 편집부의 누군가는 아이돌 전반에 대한 편견이 있으셨던 모양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닫았다.
“이런 논조로 글을 쓰실 분이 아닌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찜찜해했던 건,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대중문화 담당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들은 “난 원래 아이돌 별로 인정하지 않는데 아무개는 진짜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이나, 업계 선배에게 들은 “아무개는 진짜 그 회사에 과분한 사람이지”같은 말들. 분명 선의에서 나온 칭찬인데, 뜯어보면 칭찬하는 특정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전반에 대한 저평가와 무시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말들을 들은 경험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그것도 대중문화 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로부터. 그나마 업계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상황이 이러니, 어디 가서 “난 아무개를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렇군요”가 아니라 “의외네요”란 이야기를 먼저 듣는 희한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승환이나 이소라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아무도 그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지만, 샤이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유를 먼저 묻는 이 불균형한 잣대란. 한국방송 <불후의 명곡>이 꾸준히 아이돌이라고 해서 가창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매주 증명하고, 지드래곤과 지코, 종현과 예은이 셀프 프로듀싱 능력을 입증해도 ‘아이돌’ 일반에 대한 이 공고한 편견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아이돌이란 이유로
일단 한 수 접어서 생각하고
족벌언론이란 이유로
작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는 일이
신영복 교수가 썼다는 이유로
애꿎은 현판을 가는 일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음악을 잘하면 ‘아이돌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가창력’이라 칭찬하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려 깊은 면모를 보여주면 ‘개념 아이돌’이라 말하는, 칭찬 뒤에 숨겨진 아이돌 전반에 대한 공고한 편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쩌면 아이돌 대 비아이돌이라는 가상의 진영이 음악을 음악으로 평가하는 것을 막고 발언을 발언대로 평가하는 것을 막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업적으로 육성해 빚어낸 상품이 음악성을 갖추면 뭐 얼마나 갖출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는 적대가 빚어낸 진영. 음악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느냐에 기반해야 하지만, 이렇게 일단 출신 자체를 문제 삼아 놓고 그 결과물을 평가하니 자꾸 찬사를 보내도 아이돌‘치고는’ 노래를 잘하고, 아이돌‘치고는’ 개념있는 행동을 한다는 투의 뒤틀린 찬사밖에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 이전에 그의 소속을 먼저 보는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함정을 피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대단한 악의 없이도 부지불식중에 상대를 성별로, 나이로, 출신지역으로, 종교로, 지지 정당으로, 부의 수준으로, 소속단체로, 심지어는 취향으로 나누어가며 정의 내린다. 그 편견 속에서 우린 종종 상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 자체로 경청하는 대신 피아 구분을 기반으로 걸러 듣는다. 이게 심해지면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대중문화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여당 안에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며 곤란함을 토로한 한 여당 의원의 인터뷰 기사. 밑에 달린 댓글 중 하나는 ‘순진한’ 사람들을 조소한다. 이 또한 ‘여당 안엔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다’는 점을 어필해 중도층의 이탈을 막으려는 여당의 흉계에 불과한데 왜들 속느냐고. 여야를 막론하고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결합해 국정화를 막는 게 우선일 텐데, 그 말을 꺼낸 이의 소속 정당이 여당이니 일단 거르거나 그 진의를 의심한다. 메신저가 누구냐에 집중하느라 메시지 자체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지금 필요로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당 의원조차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목소리인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일단 새누리당은 나쁘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진영논리인가? 이와 비슷한 편견의 시선을, 오늘(10월24일) 첫 방영하는 드라마도 만만찮게 겪고 있다.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실사화한 드라마, 제이티비시(JTBC) <송곳>이 바로 그것이다. <송곳>이 제이티비시에서 드라마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환호한 이들만큼이나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이도 많았다. ‘노동 3권’, ‘노동조합’, ‘파업’, ‘투쟁’, ‘해고는 살인이다’처럼 그간 한국 드라마에선 금기시되거나 곁다리 정도로 소비되어왔던 구호들을 아예 중심 줄거리 삼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하필 수십년간 무노조 경영을 ‘경영철학’ 삼았던 삼성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제이티비시에서 방영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우려가 죄다 아무 근거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삼성 일반노조가 법원으로부터 그룹 노조로서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뒤에도 그룹 차원의 노조 탄압은 계속되는 중이고, 계열 분리를 한 이후에도 삼성과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사이의 관계는 돈독해 보이니까. 메신저가 미덥지 못하니, 원작이 담고 있는 메시지조차 혹 어떻게 뒤틀어 자사의 입맛에 맞게 바꾸진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서, 지난 몇년간 한국 부유층의 속물근성과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대한 가장 집요한 관찰을 수행한 안판석·정성주 콤비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2012)과 <밀회>(2014)를 방영한 방송사가 제이티비시였다는 사실이나, 제이티비시와 중앙일보는 삼성과는 달리 노동조합이 있으며 그 역사도 짧진 않다는 사실,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 영입 뒤 제이티비시가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도 피하지 않고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자주 생략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비평을 할 대상인 작품이 공개되기도 전이다. 어떠한 종류의 프로파간다든 그 뒤에 있는 세력의 정체에 대해 사유하고 경계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 또한 평가의 대상이 될 실체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직 드라마가 방영되지도 않았는데, 메시지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메신저가 미덥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최근 대통령기록관의 정문 현판이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교체되었다는 뉴스로 세간이 떠들썩했다. 처음 현판의 손글씨를 쓴 사람이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인데, 그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전력이 있으니 그의 글씨를 대통령기록관의 현판으로 삼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보수단체의 항의가 있었다는 것이 교체의 이유였다. 수많은 이들이 글씨에도 이념이 있느냐 물었고, 그러면 신 교수의 손글씨를 로고 삼은 소주 브랜드 또한 좌경 소주냐고 비아냥거렸다. 메신저가 싫으면 그가 전하는 메시지조차 다 싫어지는 극우세력의 진영논리는 분명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자신의 편견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비웃던 이들의 진영논리를 똑같이 답습하게 된다. 아이돌이란 이유로 일단 한 수 접어서 생각하고, 새누리당이란 이유로 존중할 만한 말을 해도 수용하지 않으며, 족벌언론이란 이유로 작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단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는 일이, 과연 신영복 교수가 썼다는 이유로 애꿎은 현판을 가는 일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일단 한 수 접어서 생각하고
족벌언론이란 이유로
작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는 일이
신영복 교수가 썼다는 이유로
애꿎은 현판을 가는 일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음악을 잘하면 ‘아이돌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가창력’이라 칭찬하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려 깊은 면모를 보여주면 ‘개념 아이돌’이라 말하는, 칭찬 뒤에 숨겨진 아이돌 전반에 대한 공고한 편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쩌면 아이돌 대 비아이돌이라는 가상의 진영이 음악을 음악으로 평가하는 것을 막고 발언을 발언대로 평가하는 것을 막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업적으로 육성해 빚어낸 상품이 음악성을 갖추면 뭐 얼마나 갖출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는 적대가 빚어낸 진영. 음악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느냐에 기반해야 하지만, 이렇게 일단 출신 자체를 문제 삼아 놓고 그 결과물을 평가하니 자꾸 찬사를 보내도 아이돌‘치고는’ 노래를 잘하고, 아이돌‘치고는’ 개념있는 행동을 한다는 투의 뒤틀린 찬사밖에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 이전에 그의 소속을 먼저 보는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함정을 피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대단한 악의 없이도 부지불식중에 상대를 성별로, 나이로, 출신지역으로, 종교로, 지지 정당으로, 부의 수준으로, 소속단체로, 심지어는 취향으로 나누어가며 정의 내린다. 그 편견 속에서 우린 종종 상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 자체로 경청하는 대신 피아 구분을 기반으로 걸러 듣는다. 이게 심해지면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대중문화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여당 안에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며 곤란함을 토로한 한 여당 의원의 인터뷰 기사. 밑에 달린 댓글 중 하나는 ‘순진한’ 사람들을 조소한다. 이 또한 ‘여당 안엔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다’는 점을 어필해 중도층의 이탈을 막으려는 여당의 흉계에 불과한데 왜들 속느냐고. 여야를 막론하고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결합해 국정화를 막는 게 우선일 텐데, 그 말을 꺼낸 이의 소속 정당이 여당이니 일단 거르거나 그 진의를 의심한다. 메신저가 누구냐에 집중하느라 메시지 자체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지금 필요로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당 의원조차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목소리인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일단 새누리당은 나쁘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진영논리인가? 이와 비슷한 편견의 시선을, 오늘(10월24일) 첫 방영하는 드라마도 만만찮게 겪고 있다.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실사화한 드라마, 제이티비시(JTBC) <송곳>이 바로 그것이다. <송곳>이 제이티비시에서 드라마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환호한 이들만큼이나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이도 많았다. ‘노동 3권’, ‘노동조합’, ‘파업’, ‘투쟁’, ‘해고는 살인이다’처럼 그간 한국 드라마에선 금기시되거나 곁다리 정도로 소비되어왔던 구호들을 아예 중심 줄거리 삼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하필 수십년간 무노조 경영을 ‘경영철학’ 삼았던 삼성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제이티비시에서 방영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우려가 죄다 아무 근거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삼성 일반노조가 법원으로부터 그룹 노조로서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뒤에도 그룹 차원의 노조 탄압은 계속되는 중이고, 계열 분리를 한 이후에도 삼성과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사이의 관계는 돈독해 보이니까. 메신저가 미덥지 못하니, 원작이 담고 있는 메시지조차 혹 어떻게 뒤틀어 자사의 입맛에 맞게 바꾸진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서, 지난 몇년간 한국 부유층의 속물근성과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대한 가장 집요한 관찰을 수행한 안판석·정성주 콤비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2012)과 <밀회>(2014)를 방영한 방송사가 제이티비시였다는 사실이나, 제이티비시와 중앙일보는 삼성과는 달리 노동조합이 있으며 그 역사도 짧진 않다는 사실,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 영입 뒤 제이티비시가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도 피하지 않고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자주 생략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비평을 할 대상인 작품이 공개되기도 전이다. 어떠한 종류의 프로파간다든 그 뒤에 있는 세력의 정체에 대해 사유하고 경계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 또한 평가의 대상이 될 실체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직 드라마가 방영되지도 않았는데, 메시지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메신저가 미덥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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