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모차르트!>에서 모차르트 역에 캐스팅됐던 가수 이수는 과거 미성년자 성매수 혐의 전력으로 팬들 사이에 논란이 커지자 결국 하차했다. 이엠케이(EMK)뮤지컬컴퍼니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여자들에 대한 오랜 편견 중 한 가지는 ‘아무리 사과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이를테면 “알았어, 내가 미안해”라고 이야기해도 여자들은 바로 이렇게 되물어 온다는 이야기다. “뭐가 미안한 건데?” 이 편견이 성찰 없이 도달한 결론은 이런 모양새다. ‘여자들은 한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상대가 사과를 해도 화가 풀릴 때까지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미안하느냐 자꾸 묻는 건 그저 계속 화가 나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가 사과를 받지 않는 건 “내가 저지른 이러이러한 잘못에 대해 사과한다. 앞으로 그러지 않을 것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러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 건지 명확히 해두지 않고 얼버무리는 사과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단 뱉고 보는 말처럼 들리지 않겠나.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도 수년 전까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말을 해줘야 그에 맞춰 사과를 할 것 아닌가” 운운하면서 말이다. 다행히도 내 주변엔 어떻게 사과를 해야 진심이 느껴지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인내해준 이들이 있었다. 덕분에 난 상대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어필하고 있었으며, 내가 그 어필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무시한 탓에 폭발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는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하거나,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상대에게 무슨 잘못을 했고 그것이 어떤 의미로 잘못된 일인지를 꾹꾹 짚어서 사과하려 애쓰며 살고 있다. 막연하게 내뱉는 “아, 알았어. 미안해”라거나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같은 말들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 이젠 알 것 같으니 말이다.
한번 개안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하던가. 깨닫고 나니 세상에 성의 없는 사과와 “사과했으니 이제 그만 용서하자”는 맞장구가 얼마나 많은지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최근 버전은 뮤지컬 <모차르트!>의 제작사 이엠케이(EMK)뮤지컬컴퍼니(이하 이엠케이)가 지난 21일 발표한 이수 하차 안내다. 가수 이수가 모차르트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뮤지컬 팬들 사이에선 이수 하차 운동이 전개됐다. 작품의 특성상 모차르트 역을 맡은 배우는 극 내내 또다른 자아인 ‘아마데’를 연기하는 아역 배우와 함께 무대에 서야 하는데, 과거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존스쿨(기소유예조건부 성구매자 재범 방지 교육소. 성구매 초범에게 처벌 대신 성 인식 개선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로 운영되는 교화기관) 교육 처분을 받은 이수가 그런 역을 맡아도 좋은지가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팬들은 <모차르트!>의 라이선스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빈극장협회(VBW)와 원작자, 주한오스트리아대사관, 오스트리아 모차르트재단에 문제 제기를 하며 항의 수위를 높였다. 결국 21일 제작사는 이수의 하차를 발표했다.
EMK ‘모차르트!’ 이수 하차 관련
문제 제기한 이들에 사과는 안해 ‘코미디 빅리그’ 제작진·장동민은
안하느니만 못한 사과 제대로 보여 연극 ‘보도지침’ 제작사 LSM도
‘젊은 여성’에 대한 사과 끝내 안해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떻게 할지를
약속하지 않는 한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리는 이엠케이의 공지에서 문제 제기를 한 이들에 대한 사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 캐스팅과 관련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은 있었지만, 뒤이어 서술된 내용은 이수의 새 출발과 멋진 무대를 기대했던 만큼 이번 결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에 대한 심경 토로였다. 이수의 출연에 기대를 걸었던 관객들에게 사과하며 “이수씨의 다음 행보를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한 이엠케이의 공지는 “<모차르트!>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이번 캐스팅 논란으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말을 반복하며 마무리된다. 물론 이수를 아끼는 팬들 입장에선 이번 일이 결코 즐거운 일일 수 없으니 제작사가 이들에게 사과하는 게 꼭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 제기를 한 이들에 대한 제작사의 성의 있는 입장 표시는 생략되어 있으니, 부득이하게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대체 누구한테 뭐가 미안한 건데?” 티브이엔(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콩트 ‘충청도의 힘’을 선보였다가 한부모가정 아동 조롱 논란 끝에 하차한 장동민의 사례도 비슷한 예일 것이다. “쟤네 아버지가 양육비 보냈나 보네” “어허, 애 듣겄어. 쟤 때문에 부모 갈라선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등의 대사가 난무했던 ‘충청도의 힘’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제작진은 어른들의 나쁜 점만 배운 아이의 모습을 통해 어른들을 풍자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설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타격하려 한 어른들의 ‘편견’을 때린 게 아니라 그 ‘편견의 피해자’를 재차 조롱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태가 이쯤 오자 처음 사과의 입장을 표명한 건 제작진이었는데,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잘못은 “시청자 여러분께 불편함을 드린 점”이란 표현으로, 문제 제기를 한 이들은 “본 코너로 인해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란 표현으로 두루뭉술하게 적어놓고선 “모든 건 제작진의 잘못이며, 제작진을 믿고 연기에 임한 연기자에게도 사과의 말을 전”한다는 말에선 갑자기 사과의 대상이 장동민을 비롯한 연기자들로 바뀌었다. 하차를 결정한 장동민이 발표한 사과문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문제도, 문제 제기를 한 이들도, 반성과 노력의 구체적인 내용도 모호한 와중에 “후배 황제성군과 조현민군, 그리고 제가 코미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티브이엔 대표님과 관계자분께는 피해가 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대목만큼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문제 제기는 시청자가 했는데, 제작진과 출연자가 서로에게 제일 열심히 사과하는 이 쓸쓸한 광경. 장동민은 사과문에서 “뉘우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사과하는 건지 희미하게 눙친 사과에서 진심을 읽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적지 않은 편지가 제대로 배달될 리 없지 않은가. 비슷한 일은 또 있다. 연극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는 작품들에 대해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가벼운 공연물들”이라 비하했던 연극 <보도지침> 제작사 엘에스엠(LSM)컴퍼니 대표 이성모는, 예매 관객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여성 관객이 불매운동을 전개하자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나마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가벼운 공연물들”이란 자신의 표현이 “잘못된 인식과 경향이 깊이 박”혀 저지른 잘못이란 점을 적시하긴 했으나, 문제 제기를 한 ‘젊은 여성’ 관객들을 콕 집어 사과하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연출, 작가, 배우들, 스태프들, 기획 홍보팀 식구들, 많은 동종업계 관계자분들, 작품에 혼신을 다하는 많은 제작자 여러분들”은 일일이 호명하며 사과하는 동안 말이다. 지면만 충분하면 비슷한 사과를 끝도 없이 더 댈 수 있으리라. 이 지면에서 소개한 사례들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니까. 비슷한 사과가 반복되는 걸 보고 하는 말인데,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대중의 피드백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누구나 조금씩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대중문화 종사자라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 탓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큼 잘못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기연민 없이 정확히 보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하지 않는 한 잘못은 용서받기 어렵다. 다른 모든 관계자에게 끼친 폐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사과를 하면서, 정작 무엇이 잘못이어서 누구에게 사과하는지 정확히 말하길 회피하는 사과는 듣는 이의 화만 돋운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들을 투명인간 취급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도 쉽게 용서하고 다시 소비자의 자리로 돌아가 순순히 지갑을 열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문제 제기한 이들에 사과는 안해 ‘코미디 빅리그’ 제작진·장동민은
안하느니만 못한 사과 제대로 보여 연극 ‘보도지침’ 제작사 LSM도
‘젊은 여성’에 대한 사과 끝내 안해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떻게 할지를
약속하지 않는 한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리는 이엠케이의 공지에서 문제 제기를 한 이들에 대한 사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 캐스팅과 관련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은 있었지만, 뒤이어 서술된 내용은 이수의 새 출발과 멋진 무대를 기대했던 만큼 이번 결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에 대한 심경 토로였다. 이수의 출연에 기대를 걸었던 관객들에게 사과하며 “이수씨의 다음 행보를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한 이엠케이의 공지는 “<모차르트!>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이번 캐스팅 논란으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말을 반복하며 마무리된다. 물론 이수를 아끼는 팬들 입장에선 이번 일이 결코 즐거운 일일 수 없으니 제작사가 이들에게 사과하는 게 꼭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 제기를 한 이들에 대한 제작사의 성의 있는 입장 표시는 생략되어 있으니, 부득이하게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대체 누구한테 뭐가 미안한 건데?” 티브이엔(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콩트 ‘충청도의 힘’을 선보였다가 한부모가정 아동 조롱 논란 끝에 하차한 장동민의 사례도 비슷한 예일 것이다. “쟤네 아버지가 양육비 보냈나 보네” “어허, 애 듣겄어. 쟤 때문에 부모 갈라선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등의 대사가 난무했던 ‘충청도의 힘’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제작진은 어른들의 나쁜 점만 배운 아이의 모습을 통해 어른들을 풍자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설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타격하려 한 어른들의 ‘편견’을 때린 게 아니라 그 ‘편견의 피해자’를 재차 조롱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태가 이쯤 오자 처음 사과의 입장을 표명한 건 제작진이었는데,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잘못은 “시청자 여러분께 불편함을 드린 점”이란 표현으로, 문제 제기를 한 이들은 “본 코너로 인해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란 표현으로 두루뭉술하게 적어놓고선 “모든 건 제작진의 잘못이며, 제작진을 믿고 연기에 임한 연기자에게도 사과의 말을 전”한다는 말에선 갑자기 사과의 대상이 장동민을 비롯한 연기자들로 바뀌었다. 하차를 결정한 장동민이 발표한 사과문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문제도, 문제 제기를 한 이들도, 반성과 노력의 구체적인 내용도 모호한 와중에 “후배 황제성군과 조현민군, 그리고 제가 코미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티브이엔 대표님과 관계자분께는 피해가 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대목만큼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문제 제기는 시청자가 했는데, 제작진과 출연자가 서로에게 제일 열심히 사과하는 이 쓸쓸한 광경. 장동민은 사과문에서 “뉘우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사과하는 건지 희미하게 눙친 사과에서 진심을 읽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적지 않은 편지가 제대로 배달될 리 없지 않은가. 비슷한 일은 또 있다. 연극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는 작품들에 대해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가벼운 공연물들”이라 비하했던 연극 <보도지침> 제작사 엘에스엠(LSM)컴퍼니 대표 이성모는, 예매 관객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여성 관객이 불매운동을 전개하자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나마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가벼운 공연물들”이란 자신의 표현이 “잘못된 인식과 경향이 깊이 박”혀 저지른 잘못이란 점을 적시하긴 했으나, 문제 제기를 한 ‘젊은 여성’ 관객들을 콕 집어 사과하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연출, 작가, 배우들, 스태프들, 기획 홍보팀 식구들, 많은 동종업계 관계자분들, 작품에 혼신을 다하는 많은 제작자 여러분들”은 일일이 호명하며 사과하는 동안 말이다. 지면만 충분하면 비슷한 사과를 끝도 없이 더 댈 수 있으리라. 이 지면에서 소개한 사례들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니까. 비슷한 사과가 반복되는 걸 보고 하는 말인데,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대중의 피드백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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