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들>(문화방송)은 ‘덕후’들을 초대해 그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이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의 음차인 ‘오덕후’의 준말로, 특정 사물이나 장르에 심취하여 탐구·수집하는 사람을 뜻한다. 과연 프로그램에는 무협지, 신발, 시장, 짬뽕 등 온갖 분야의 ‘덕후’들이 나와서 신기한 능력을 보여준다.
프로그램은 <화성인 바이러스>(티브이엔·2013년 종영)를 연상시킨다. 특이한 일반인이 출연한다는 점 외에도, 김구라, 이경규, 김성주 등 역대 진행자들이 모두 <화성인 바이러스> 출신이다. 하지만 <화성인 바이러스>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화성인 바이러스>는 출연자들이 얼마나 이상한가에 방점이 찍혔다면, <능력자들>은 그들의 능력에 주목한다. 덕후들을 음습한 괴짜로 보는 게 아니라, 일종의 달인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능력이 <생활의 달인>(에스비에스)에서처럼 노동의 결과가 아닌 ‘덕질’의 결과라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오타쿠는 과거 일본에서도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1983년 나카모리 아키오가 ‘세기말적으로 우글우글 어두운 마니아 소년들’을 오타쿠로 명명한 이래, 1989년 여아살해범의 오타쿠 성향이 보도되면서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굳어졌다. 오타쿠는 사회병리적 문제로 치부되었고, 오타쿠란 말은 1997년까지 공영방송에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등 오타쿠를 문화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책이 나오기도 하고, 2007년 선거에선 “시부야를 오타쿠 거리로 만들겠다”는 공약이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에서 오타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콘텐츠 산업을 떠받치는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다.
<능력자들>에서 보여주듯 한국의 오타쿠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이유가 뭘까. 우선 인터넷의 발달로 지식의 판도가 바뀐 것을 꼽을 수 있다. 과거 큰 인기를 누렸던 <장학퀴즈>나 <퀴즈 아카데미>와 같은 퀴즈쇼는 사라졌다. 누구나 간단 검색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지식의 보유는 신기할 게 없다. 이제 지식은 더욱 세분화되어 그 사람만 알 수 있는 무엇이 되거나, 모든 일반적인 지식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요한다. 여기서 덕후들의 강점이 빛난다. 덕후들이 수집한 별별 세세한 정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타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어 유용한 지식으로 활용된다. 덕후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희귀한 콘텐츠를 방류하는 원천인 셈이다. 또한 고립되었던 덕후들끼리 교류하면서 덕후들만의 독특한 관점을 지닌 의견이 만들어지고,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반면 덕후들의 단점은 사소해졌다. 전체 사회적으로 대면관계가 줄면서 덕후들의 ‘사회성 없음’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과거에 사람들은 업무에서는 전문성을 추구하고, 일상생활에서는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업무에서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감기가 짧아진 전문지식보다 시장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다중 업무능력이나 통섭적인 문제해결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반면 욕망의 다각화로 인해 취향에 있어서는 고도의 전문성이 추구된다. 이제 자본은 덕후에게 주목한다. 이들의 콘텐츠 중 자원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거나 이들의 열정적인 소비행태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덕후 현상에서 생각해야 될 점은 따로 있다. 생계노동과 무관하게 시간과 열정과 비용을 특정 분야에 쏟아붓는 덕후의 존재는 노동 중심의 사회가 빠르게 해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의 덕질에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지만, 이미 덕질은 사회화되었으며 전체 사회의 인지자본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오직 자본이 고용한 임노동에만 화폐를 지불하는 현재의 분배시스템이 덕후들이 생산한 사회적 가치를 수탈하고 있는 셈이다. 프로그램에서 지급하는 ‘덕후 생활 지원금’은 기본소득의 형태로 전체 사회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