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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1 10:59 수정 : 2016.08.11 20:29

블랙박스 영상만 다루는 방송 프로 늘어
<맨 인 블랙박스> 정규 편성까지
본인 아닌 제3자 사고영상 제보 많아
영상 속 당사자 모르게 방송 나가기도
경찰, 본인·유족 모르게 영상 배포도
“제보영상 활용 사회적 합의 만들어야”

최근 정규 편성이 확정된 에스비에스 ‘맨 인 블랙박스’. <에스비에스> 제공
블랙박스가 없을 땐 어떻게 방송했을까 싶다. 최근 몇 년 새 티브이에 블랙박스 영상이 필수 요소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영상 등장 빈도 증가는 블랙박스 보급과 연관이 있다. 2011년 600억원대였던 차량용 블랙박스 매출은 지난해 1900억원대에 이르렀다. 블랙박스 영상만 다루는 단독 프로그램도 생겼다. 지난 2일 맛보기(파일럿) 프로그램에 이어 정규편성이 확정된 <맨 인 블랙박스>(에스비에스)가 그 주인공이다. 2011년부터 아침방송 <모닝와이드> 속 코너로 방송된 ‘블랙박스로 본 세상’의 확장판이다. ‘블랙박스로 본 세상’은 누적 제보영상이 10만건이 넘고 코너 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네이버 티브이캐스트에 단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맨 인 블랙박스> 맛보기 방송 시청률은 5.7%(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다양한 제보영상을 재료로 삼는 <맨 인 블랙박스> 제작진은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사고를 방지하는 공익적 목적을 강조한다. 진행자 김구라는 곧 운전면허를 딸 아들에게 “운전이 이렇게 위험한 것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이 방송을 꼭 보여주겠단다. 반면 ‘충격적인 장면을 통한 손쉬운 시청률 장사’라는 비판도 있다. 더 큰 문제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 내 가족의 사고 장면이 티브이에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사고 당사자 동의 없이 방송 블랙박스는 본인이 사고를 당했을 때 증거로 쓰려는 용도다. 국내 최대 규모의 온라인 블랙박스 동호회에는 본인 사고 영상을 올리며 과실비율을 묻는 글이 일주일에 수십건씩 올라온다. 주행 중이나 주정차 중에도 녹화가 되면서 우연히 타인의 사고 장면이 담기기도 한다. 경찰수사때 CCTV와 함께 주변 블랙박스 영상부터 확보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블랙박스 영상을 통한 교통위반 신고도 크게 늘었다.

최근 ‘블랙박스로 본 세상’에서는 도로 위 난투극이나 터널 내 차량전복 사고, 고속도로 갓길 추돌 사고 등을 내보냈는데 모두 제보자와 상관없는 타인이 겪은 사고가 찍힌 영상이었다. 제작진은 영상 속 당사자 확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인정했다. 공익적인 측면에서 보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확인 과정 없이도 방송에 내보낸단다. 대신 신원 노출이 안 되도록 모자이크 처리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모자이크 처리만으로 초상권 침해를 100%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사소한 디테일로도 개인이 특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 블랙박스 영상은 제보자의 소유지만 거기에 찍힌 사람의 초상권은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영상을 우연히 티브이로 접했을 때 당사자는 당혹감과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여러 차례 “공익적 차원임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공익이라는 명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맨 인 블랙박스>의 작가는 지난달 블랙박스 영상이 많이 올라오는 ‘보배드림’ 누리집 게시판에 제보 요청 글을 올리며 ‘황당하거나 깜짝 놀랄 만한’ 영상을 보내달라고 썼다. 온라인 블랙박스 동호회에는 홈쇼핑 채널이 블랙박스 판매를 위해 빗길 교통사고 영상을 요청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프로그램 내 광고용 영상으로 쓰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경찰이 본인·유족 동의 없이 배포도 뉴스의 사고 영상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일 일가족 4명이 사망한 부산 감만동 교통사고는 차량 내부 블랙박스 영상이 언론에 공개되며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급발진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희생자들이 생전 마지막으로 외친 목소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 영상은 경찰이 부상당한 운전자와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언론에 제공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유족이 경찰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상은 이미 재가공돼 유튜브 등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영상을 배포한 부산지방경찰청 홍보실 관계자는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이고, 언론에서 요구해 응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이 배포하고, 언론사가 편집해 공개한 ‘무단횡단 사망 사고’ 영상도 문제다. 비록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일부분만 보여준다고 해도 충돌 직전의 사망자 모습, 충격으로 깨진 유리창 등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서울 강남구 등 장소와 사망자 나이, 성까지 나온다. 모두 경찰이 공개한 내용들이다. 이 역시 유족에게 고지를 하거나 동의을 얻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무단횡단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자는 공익적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논의 시작해야” 아직까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았지만, 법조계에서는 이런 경우 인격권 침해로 인한 정신적 피해보상 등을 청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튜브 등에 마구잡이로 업로드된 블랙박스 영상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에서 블랙박스 제보영상 활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김언경 사무처장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블랙박스 영상을 흥미 위주로 소비하고 있다. 꼭 보여줄 필요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 티브이를 통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노출되고 있다. 특히 영상에 찍힌 당사자에게 동의를 받지 않고 내보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심의 규정에도 아직 블랙박스 제보영상과 관련한 내용이 없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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