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02 18:29
수정 : 2017.01.0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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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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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일밤-은밀하게 위대하게’
김영철·박건형 등 ‘꿈’으로 유인
“김칫국” “일장춘몽” 등 자막내고 깔깔
당한 연예인들 화도 제대로 못내
“몰카는 전형적인 왕따 매커니즘” 지적
20년전 프로그램 재탕한 제작진들
인권침해 문제 인식 뒤떨어져 비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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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바보 만들고 좋아하는 예능이라니. 지난달 4일 시작한 몰래카메라 <일밤-은밀하게 위대하게>(문화방송)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집단으로 남을 속이며 한 사람을 바보 만든 뒤, 그걸 모여서 깔깔거리며 지켜보는 행위를 ‘재미’라는 이름으로 방영한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보는 일요일 오후 시간대 지상파에서 버젓이 전파를 타고 있다는 점도 문제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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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한낱 웃음거리로 가장 논란이 컸던 방송은 개그맨 김영철과 배우 박건형을 속였던 편이다. 제작진은 그들의 ‘꿈’을 교묘히 이용했다. 김영철은 할리우드 진출이 꿈이다. 매니저를 통해 할리우드 제작자한테 연락이 왔다며 오디션 영상을 보내야 한다고 속인다. 당장 찍어야 한다는 얘기에 김영철은 영하의 날씨에 야외 공원에서 할리우드에 보낼 영상을 촬영한다. 내 꿈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희망에 추위도 아랑곳없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의 모습을 두고 제작진은 자막으로 “그 꿈 이뤄질 거예요 일장춘몽으로”, “김칫국 한 트럭 마셨어”라고 놀리기까지 한다. 진행자인 이국주, 윤종신 등은 “어떡하냐. 너무 진지하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뒤에 숨어 지켜보며 배꼽 잡고 웃기 바쁘다.
한창 골프 재미에 빠진 박건형은 그 ‘즐거움’을 이용해 바보로 만들었다. 제작진은 스크린골프 조작으로 경력 1년의 박건형이 비거리 300m를 치게 하고, 생애 첫 버디와 홀인원까지 경험하게 했다. 자동차와 현금 179만원까지 경품으로 받은 박건형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처럼 환호성까지 내질렀다. 상상 이상으로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진행자들은 웃겨 죽지만, 몰래카메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이 외에도 불운이 이어져 당황하는 가수 설현의 모습을 웃음거리로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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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 전보다 더 심각해진 인권침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1991~1992년 인기를 끌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경규의 몰래카메라>의 2016년 버전이다. 당시 체감 시청률이 70%는 웃도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연출하는 안수영 피디는 방송 전 기자간담회에서 “관찰 예능 시대에 (몰래카메라가) 가장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고 생각해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90년대는 방송사도 시청자도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했던 시절이다. 남이 당하는 걸 보고도 그저 재미있게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90년보다 인권침해적 요소도 더 심해졌다. 그저 보고 웃던 차원을 넘어 진행자인 윤종신, 이국주, 존 박, 이수근, 김희철이 집단으로 속는 자를 품평하기도 한다. 안 피디는 “지인이 지인을 속이는 설정을 차용해 사전에 제작진과 함께 회의하며 불쾌함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했다”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인이라는 점에서 더 큰 위험성을 제기한다. 한 케이블 예능 피디는 “평소 잘 아는 사람이 불러낸다면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몰래카메라는 왕따 메커니즘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꼬집었다. “시청자에게 웃음을 준다는 핑계로 너 한 사람만 바보 되면, 우리 다 같이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가해자(속이는 자)와 피해자(속는 자), 방관자(시청자)로 나뉘어 방송 시점에서만 웃고 끝났던 90년대와 달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환경이 발달한 요즘은 관련 영상이 수없이 재유포되며 계속해서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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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프로 재탕 ‘무사안일주의’ 당한 연예인들은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한다. 톱스타가 아니라 캐스팅 등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연예인에 대한 거대 지상파 방송사의 갑질을 웃음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김영철은 몰래카메라라는 사실을 안 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시나마 행복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한 케이블 예능 피디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속인 곳은 문화방송이고, 주도한 사람은 그의 소속사 사장인 윤종신이다. 힘있는 스타가 아니라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낼 수 없다”고 했다. 배우 김수로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해외에서 일 보는 사람을 서울로 빨리 들어오게 해서 몰카짓 하는 건 너무나 도의에 어긋난 방송이라고 생각한다”며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가리키는 듯한 글을 올린 적은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추억 만들었다며 훈훈하게 끝났다.
20년도 더 된 시절 나온 인기 프로그램을 재탕하는 것을 두고 제작진의 게으름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다. 기자간담회에서 “스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던 윤종신의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을 대변한다. 90년대와 달리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연예인의 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요즘에는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 김선영 평론가는 “90년대 프로그램을 가져오면서 달라진 시대의 사고, 환경 등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과거의 인기에 기댄다는 점에서 방송국의 무사안일주의의 심각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수영 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편안하고 유쾌한 웃음을 줄 수 있도록 더 주의하고 노력하겠다. 크리스마스 특집 때처럼 시민을 찾아가는 등 행복을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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