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03 14:22
수정 : 2017.02.03 20:09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문화방송, 이하 <역적>)은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다. 홍길동은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허구적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는 실존인물이다. 연산군 6년에 ‘강도’ 홍길동이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추국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홍길동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적떼가 된 농민 무장군의 수괴이자 반체제 사범이었음을 말해준다. 즉 ‘의적’ 홍길동의 이야기가 백년 이상 회자되는 가운데,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을 통해 홍길동의 일대기를 판타지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홍길동은 판서집안의 서출로 신출귀몰한 도술을 부리며 활빈당을 이끌고 탐관오리와 싸운다. 홍길동은 병조판서 직을 제수받지만, 이를 거부하고 율도국으로 가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 홍길동은 오백년 이상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히어로’ 캐릭터로, 1900년대 초 ‘활빈당’이란 이름으로 부자의 재산을 탈취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던 농민군도 존재했다. 홍길동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하여, <쾌도 홍길동> <홍길동의 후예> <탐정 홍길동> 등이 그 변주이다.
<역적>은 실존인물 홍길동을 모델로 삼아, 민중영웅 설화인 아기장수 이야기를 덧댄다. 드라마는 1~2회를 통해 2부작 드라마라 해도 좋을 만큼 완결적인 서사를 보여주었다. 노비 아모개(김상중)는 아들 길동이 아기장수임을 알고,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아기장수는 “못 참는 종자”이기에 아기장수도 가족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며, 아모개는 어린 길동에게 힘을 숨길 것을 당부한다. 외거노비가 되기 위해 처음 장사에 나선 아모개는 포졸들에게 쫓기는 도둑을 돕는다. 흔히 이런 장면에서 도둑을 함께 잡는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아모개는 도둑을 도움으로써 이들과 한패가 된다. 도둑들이 자신을 속였음을 알았을 때도, 아모개는 이들을 고발하는 게 아니라, 공권력을 활용하여 이들을 찾고 협력관계를 이어간다. 억압받는 노비가 지닌 공권력과 범죄, 적과 동지에 대한 사고와 감각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불법을 넘나들며 재물을 모은 아모개는 면천을 시도하지만, 양반의 탐욕에 의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모든 희망을 잃은 그가 “어째서 그때는 이 생각을 못했을까?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 다 죽여불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왜 못했을까?”라 말하며 낫을 치켜드는 장면은 흡사 <아리랑>을 보는 듯한 서늘함을 안긴다.
<역적>은 아기장수 설화를 원형으로 삼아, 혁명가의 탄생을 그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서사를 펼쳐낸다. 드라마는 첫 장면부터 홍길동과 연산군을 대립시키며 강렬한 주제의식을 뿜어낸다. 연산은 길동에게 “멸족한 고려 왕족의 후손이나, 판서 가문의 서자”인지 묻는다. 길동이 씨종의 아들이라 답하자, 연산은 천한 몸에서 너 같은 인물이 날 수 없다며 안달한다. 길동이 “그대는 하늘의 아들이신 나라님의 몸에서 어찌 그리 천한 자가 되었습니까?”라고 되묻는데, 이는 출신이 사람의 귀천을 결정짓지 못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신분사회에서 출신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드라마에서 양반의 가족은 아모개의 지략, 홍길연의 학습능력, 홍길동의 힘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길동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깨기 위하여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21세기 세습자본주의의 도래로 계급은 다시 신분으로 굳어지고 있다. 3세 경영, 금수저, 흙수저 등은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비추는 말들이다.
연산과 길동의 대립은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이란 제목과 더불어 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왕의 관점에서 보자면 길동이 역적이다. 하지만 백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산이 역적이다. 나라에 충성한다고 했을 때, 나라가 왕을 의미하는지, 백성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뜻이 달라진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왕정시대에, 충성은 왕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입니다’라고 말해지는 공화정시대에, 충성은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개념의 극명한 차이를 경험한 바 있다. 박근혜 정권은 공화정 안에서 왕정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애국이란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박근혜와 함께 시대착오적 왕정의 몽환에 취해있던 사람들에게 공화정의 가치를 일깨우는 죽비였다.
<역적>은 근대 시민혁명의 의미와 공화국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왕조사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것과 민중사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극이다. 역사교과서 논쟁이 친일사관이냐 민족사관이냐를 넘어, 더 심층적인 논의로 확대되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화국의 가치가 훼손되고, 세습자본주의가 고착화되고 있으며, 역사전쟁이 진행 중인 지금, 대단히 근원적인 화두를 던지는 사극의 출현이 몹시 반갑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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