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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0 20:10 수정 : 2017.03.10 21:04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플리백>

한 여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시청자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속사포 랩을 하듯 쏟아낸 속마음을 요약하면 ‘문밖의 저 남자와 침대로 갈 준비를 마쳤다는 것’. 여자는 곧 문을 열고 남자와 함께 침실로 직행한다. 베드신이 펼쳐지는 가운데에도 시청자를 향해 말 걸기는 그치지 않는다. 방백과도 같은 여자의 끊임없는 말하기 때문에 행위를 주도하던 남자는 어느새 무대 주변으로 밀려난 단역처럼 보인다.

도입부부터 톡톡 튀는 기법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비비시>(BBC) 6부작 드라마 <플리백>은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초연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던 동명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는 자기고백으로 채워진 소극장용 여성 1인극이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내며 공영방송 드라마로까지 진출했다는 것 자체가 작품의 남다른 힘을 증명한다. 티브이 드라마 역시 원작의 작가이자 주연배우였던 피비 월러브리지가 그대로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쳐 호평받았다.

<플리백>의 핵심 매력은 독특한 개성의 여주인공에 있다. 그동안 영국 대중문화는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조지 엘리엇 등 선구적인 여성주의 작가들의 두터운 유산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재창조된 인상적인 히로인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왔다. 전세계적 ‘칙릿’ 열풍의 시초인 ‘브리짓 존스’가 대표하듯 억압당해왔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현대 여성의 솔직한 초상으로 사랑받았다. <플리백>의 주인공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솔직하다 못해 극단적으로 찌질한 면까지 들춰낸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여성은 드라마 제목처럼 스스로를 ‘허접한 인간’이라 말한다. 새벽 두 시에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와서 자신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한심하고 타락한 변태’라는 푸념을 늘어놓고, 남자친구를 달래주기 위해 와인을 훔쳐 달아나는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미덕도 바로 거기에 있다. 플리백의 불안하고 좌충우돌하는 내면은 페미니즘의 수혜로 욕망의 표현은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굳건한 남성 중심적 세계 안에서 자아는 축소되는 현대 여성들의 역설적 현실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저 강렬한 도입부에서도 시청자들을 향한 솔직한 욕망의 고백과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태도가 모순을 빚는 플리백의 분열적 내면이 잘 드러난다. 페미니스트 강연회에서 ‘지난 5년을 완벽한 몸매와 교환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난 저질 페미니스트”라고 자책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비호감’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느새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은 한없이 사랑스러워진다.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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