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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3 15:33 수정 : 2017.03.23 21:52

요즘 가장 불쌍한 예능 피디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제작발표회를 하는 피디들이다. 모름지기 출연자들과 제작발표회를 하고 나면 기사도 수십 개 뜨고 검색어도 하루 종일 오르내려야 마음이 놓인다. 몇몇 발언은 논란도 되고 해명도 하면서 하루 종일 난리를 쳐야 사람들은 겨우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하는지 알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즘은 뭘 해도 이슈가 안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이어 촛불집회, 탄핵까지 잇따라 대한민국을 강타하면서 정치 이슈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다 뺏어가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무당과 호스트바, 비아그라와 대포폰이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정치와 예능의 경계는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분노가 사람들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아무래도 사람의 감정 중에 분노만큼 강한 것은 없다. 거기다 비웃을 거리, 쓴웃음을 짓게 만든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빵빵 터지는 웃음을 위해 달려온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들로선 생각지도 못한 위기를 만난 셈이다. 중국 유커들이 싹 사라진 명동 거리에서 장사를 해야 하는 상인들의 심정과 비슷한 것 같다.

<썰전>. 제이티비시 제공
물론 나름 선방한 예능들도 많다. 이런 시기의 사람들은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가벼운 웃음보다는 조금이라도 얻을 게 있는 의미 있는 예능, 그리고 더 리얼한 예능을 찾게 마련이다. 정치예능 <썰전>은 뜻밖의 대목을 맞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화두를 던진 <차이나는 클래스>도 큰 반응을 얻었다. 거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김병만식 리얼 예능 <주먹쥐고 뱃고동>은 정규편성을 받았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관계, 즉 내 옆 사람들을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러니 실제 부부의 생활을 담은 <신혼일기>나 <미운 우리 새끼>같은 가족 예능들은 이 와중에도 탄탄했다. 현실이 힘들다 보니 과거의 것들이 더 그립게 마련이다. <불타는 청춘>은 여전히 따뜻했고 <해피투게더>의 15주년 특집은 고마웠다. 몸개그가 난무했던 무한도전 재방송도 적당했다.

사실 예능 프로그램은 항상 사회 변화와 함께 진화해 나간다.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 때는 <경제야 놀자> 같은 경제 관련 예능이나 공익적인 프로그램들이 사랑을 받았다. 경제가 다시 좋아지면서 <동거동락>, <천생연분>같이 많은 출연자들이 온갖 개인기를 뽐내던 초대형 버라이어티들이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웰빙이 화두였으니 잘 먹고 잘 사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히트를 쳤다.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절정을 달렸고 <무한도전>, <1박2일>이 시작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과 성공스토리를 보여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대였다. 지금은 헬조선과 같이 자조섞인 말들이 유행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예능, 그리고 먹방과 쿡방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고 한끼 식사의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냉장고를 부탁하고 편의점을 털었다. 예능 프로그램도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담아내는 또 하나의 그릇이다.

그러니 솔직히 지금 이 글은 어느 예능 피디의 넋두리일 뿐이다. 정상적인 국민이라면 지금 이 순간 다른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다시 바로 서기 위한 노력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잠시 조금 손해 보더라도 하루 빨리, 그러나 꼭 제대로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을 것이다. 그래야 더 건강한 웃음도 가능할테니 말이다.

다행히 준비 중인 새 프로그램의 첫 방송이 5월 말에 잡혔다. 그때쯤엔 사람들이 조금 일찍 퇴근해서 마음 편하게 예능 하나 정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나 반전을 거듭하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기막힌 뉴스들을 보고 있자니 역시 방심은 금물이다.

박상혁 씨제이이앤엠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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