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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에 출연하는 ‘부채 상환의 아이콘’ 이상민은 12년째 빚 70억원을 갚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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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눈맞춤] ‘럭셔리’와 ‘궁상’이 만났을 때
SBS <미운우리새끼>의 시청률이 급등했다. <미운우리새끼>는 관찰 카메라를 통해 혼자 사는 아들의 일상을 엄마의 시선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지난해 8월 첫 방송 뒤 김건모, 허지웅, 박수홍, 토니안 등의 싱글라이프가 공개되면서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시청률은 10% 안팎이었는데 4월16일 이후 두 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는 방송 시간을 옮긴 영향도 있겠지만, 이상민의 출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된다.
긴 호흡으로 보여주는 ‘이 남자가 사는 법’
이상민의 인기가 이토록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현재 잘나가는 가수나 제작자가 아니다. 22살에 데뷔하여 199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가수 겸 작곡가였지만 표절 시비를 겪으며 은퇴했다. 이후 음반 제작자로 복귀해 여러 그룹을 히트시키고,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2005년 부도를 맞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012년부터 케이블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연예 활동을 재개한 이상민은 2016년부터 지상파방송에 복귀하여 현재 누구보다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이상민는 ‘부채 상환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물경 69억8천만원의 부채를 떠안고 12년 동안 꾸준히 갚고 있다는 그는 곧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화려했던 과거와 몰락의 경험, 그리고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안고 사는 이상민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은 그가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거나 과거사를 안줏거리 삼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예능에는 독특한 콘텐츠와 감흥이 존재한다. 가령 지난해 9월 JTBC <말하는 대로>에 출연한 이상민은 큰 실패로 오히려 자기 삶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거기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공염불과 다른 묘한 울림이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지난 3월에 출연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몸소 터득한 생활의 팁을 알려주었다. 적은 비용으로 럭셔리한 생활을 누리는 요령을 알려준 방송은 시청자와 실시간 소통하며 ‘럭셔리’와 ‘궁상’이 합을 이루는 짠 내 나는 웃음을 안겼다.
<미운우리새끼>는 긴 호흡으로 ‘이 남자가 사는 법’을 보여준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능숙하게 미장 공사를 하는 그의 능력을 보라. 깔끔하고 고급스런 아파트처럼 보이지만, 집주인과의 계약 때문에 에어컨도 달지 못하고 지난해 기록적인 무더위를 견뎠다는 이야기나 ‘4분의 1 임대’라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곤경을 보는 것은 진정으로 ‘웃프다’. 그나마 채권자가 집주인이며 과거 이상민이 ‘청담동 108평’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겹치면 아이러니의 층위는 한층 두터워진다. 상표도 떼지 않은 신발 수백 켤레와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는 옷이 한가득인 와중에 ‘채무자의 옷과 신발은 압류 대상이 아니다’라는 채무 상식을 읊어주다, 집들이 온 지인들이 관심을 보이자 즉석 경매에 부치는 모습은 ‘삶이 우러나는 예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거액의 빚과 이를 갚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예능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 것은 빚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1360조원 시대, 이제 빚은 삶의 조건이다. 양극화와 고용 악화로 학자금 대출, 주택담보대출 등 비교적 양호한 부채부터 카드연체와 소액대출 등을 거쳐 신용불량과 사채에 이르는 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에도 자주 나온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멋진 하루> <비스티보이즈> 등에서 로맨스의 걸림돌로 등장하던 빚은, 2010년대 이후 <화차> <차이나타운> <무뢰한> 등에서 평범한 사람의 삶을 막장으로 밀어붙이는 파괴적 면모를 드러냈다.
‘최고의 1분’ 채권자와의 만남
누구나 빚을 경험하고 관리하며 사는 시대에, 빚 70억원을 감당하며 사는 이상민의 삶은 동병상련의 위안과 인간승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혼자 차린 맛있는 식사를 앞두고 채권자의 전화를 받은 이상민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채권자들은 그의 삶을 포위하고 있다. 집을 빌려주고 보약을 보내며 상환 날짜를 환기시킨다. 공황장애 약을 비롯한 많은 약은 채무자 이상민의 삶이 녹록지 않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는다.
시청률 20%를 넘겼던 ‘최고의 1분’은 이상민이 채권자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파산절차를 통해 빚을 갚지 않는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이상민은 12년간 꾸준히 갚고 있다. 채권자는 “나 같으면 그리 못했을 것”이라며 “너를 믿었기에 끝까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광경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하였으랴.
럭셔리와 궁상이 결합된 삶을 보여주는 이상민의 예능은 저성장 세대의 거울이다. 즉, 현재의 영화나 미래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쇠락한 현재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저성장 시대의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1990년대에는 지금껏 갖지 못했던 성공을 꿈꾸라는 <성공시대>식 내러티브가 유행했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과 실패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감각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의 부모보다 가난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런 인식은 공상과학(SF)적 상상으로도 드러난다. <인터스텔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등이 그리는 가까운 미래는 문명의 풍요가 정점을 찍은 이후 망한 폐허에서 일부를 재활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풍요 이후의 빈곤은 풍요 이전의 빈곤과 다르다. 노년이 된 산업화 세대는 무조건 아끼는 것을 강조했다. 중년이 된 민주화 세대는 취향도 없는 대량소비로 풍요를 구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거치면서 취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문화적 소비가 떠올랐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고용이 악화되면서, 과거의 경험을 통해 럭셔리한 삶의 감각을 지녔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빚쟁이 세대’가 출현했다. 이들에게는 만성화된 위기를 통해 체득한 체념의 정서가 내면화돼 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외환위기 직후 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원주가 등장하여 무조건 아끼라는 잔소리를 해대는 예능프로그램이 방송됐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식의 절약을 지향하지 않는다. 고급한 취향이 무엇인지도 알고, 물질 소비가 자존감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안다. 즉, 럭셔리한 삶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 돈이 없다는 현실의 제약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은 이상민을 비롯해 취향은 있으되 돈이 없는 젊은 세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고급 신발을 신지도 않으면서 관상용으로 즐기는 감각을 이전 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공감한다. 수산시장에서 연어 대가리를 사다가 스테이크를 해먹고, 즉석에서 치즈를 만들어 먹는 요령은 이전 세대에겐 무익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따라할 만한 팁이다. 누가 이상민만큼 ‘몰락한 빚쟁이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할 수 있으랴. 짠하고 먹먹한 마음이 밀려온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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