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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16 20:07 수정 : 2017.06.16 20:24

영화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와 외모는 시너지 작용을 이루며 영화 전체의 정서를 결정하는데, 이민지는 특유의 말간 얼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며 대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스토리를 들려준다. 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토요판]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배우 이민지

영화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와 외모는 시너지 작용을 이루며 영화 전체의 정서를 결정하는데, 이민지는 특유의 말간 얼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며 대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스토리를 들려준다. 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이민지는 여러모로 낯선 배우다. 그를 어떤 작품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만나본 이들에게도 이민지는 여전히 낯설다. <짐승의 끝>(2010)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하염없이 걸어가는 임산부 순영이나 <세이프>(2013)의 불법 환전소에서 상품권을 한두 장씩 삥땅치는 계산원 민지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순한 눈빛으로 오컬트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던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2014~2015)의 하재나 안재홍과 함께 궁극의 로맨스를 연기한 티브이엔(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2016) 속 미옥처럼 본격 상업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분한 이민지의 얼굴은 분명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반면 <선암여고 탐정단>이나 <응답하라 1988> 같은 유쾌한 작품들로만 이민지를 접했던 이들에게는 그가 말간 얼굴 위에 체념과 설움, 분노와 냉소, 피로 따위를 서늘하게 영사하는 가출 소녀 소현으로 등장하는 영화 <꿈의 제인>(2016)이 낯선 경험일 것이고.

어느 골목에서 마주칠 법한

볼 때마다 아직 이 배우를 다 알지 못한다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큰 기복 없이 다양한 인물을 천연덕스레 연기해내는 이민지의 연기력이다. 더 많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전부터 지난 몇 년 새 독립영화계에 그 소문이 자자했던 이민지는, 색깔이 선명한 표정연기나 독특한 발성으로 보는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종류의 연기를 하는 대신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흡수해 자신의 말투와 몸짓으로 번역한다. 예컨대 <선암여고 탐정단>의 하재와 <짐승의 끝>의 순영의 말투 사이에, 웹 시트콤 <게임회사 여직원들>(2016) 속 마시멜과 <응답하라 1988> 속 미옥의 몸짓 사이에 아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민지는 인물을 단번에 식별하게 만드는 외적 요인에 힘을 쏟는 대신 인물이 겪고 있는 감정에 집중해 고등학생과 임산부, 2010년대와 1980년대라는 각기 다른 상황을 살아낸다. 세상에는 어디에 어떤 배역으로 가져다 놓아도 배역 앞에 자신의 이미지를 드리우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매번 다른 역할을 맡겨도 배역 속으로 온전히 녹아들어 배우보다 배역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배우도 있다. 이민지는 단연 후자에 가깝다.

물론 여기에는 스스로 “특징이 없다”고 표현하는 특유의 외모도 한몫한다. 입체적인 골격이나 크고 진한 눈, 자기 주장이 강한 콧날이나 턱선 같은 요소들로 보는 이들의 뇌리에 강하게 제 흔적을 남기는 또래 동료 배우들과 달리, 이민지는 신촌이나 동성로, 충장로나 서면 어느 골목쯤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인상의 소유자다. 둥글고 말간 얼굴 위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눈코입은 선이 이어지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면으로 녹아든다. 홑겹의 눈꺼풀로 길게 그어진 반달 모양 눈과 토끼 앞니가 조심스레 부여하는 이목구비의 리듬감은 인상적이지만 잔잔한 편이다. 매거진엠(M)과의 인터뷰에서 이민지는 농담처럼 “나 같은 얼굴이 국정원에 딱인데”라고 말했는데, 정보요원이나 배우나 모두 제 정체를 감춰 다른 인물을 위장하는 동시에 그 어느 자리에 던져 놓아도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농담 속에 묻어둔 뼈가 제법 단단하다. 20대의 초입에 길을 헤매는 임산부를 연기하고, 20대의 끝자락에 가출 청소년을 연기하며 그 모두의 얼굴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는 이민지의 말이라 더더욱 그렇다.

‘응팔’ 속 미옥 역으로 주목받아
독립영화계에선 이미 유명세
고등학생부터 임산부까지
배우보다 배역 돋보이는 연기

위화감 없이 “국정원에 딱인”
“특징 없는” 외모도 한몫
‘꿈의 제인’서 가출청소년 역
절제된 연기로 완벽히 소화

영화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와 외모는 시너지 작용을 이루며 영화 전체의 정서를 결정하는데, 트랜스젠더 여성 제인 역할을 맡은 구교환이 영화의 색깔과 온도를 이끌고 간다면 이민지는 특유의 말간 얼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며 대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스토리를 들려준다. 이민지가 맡은 배역인 가출 청소년 소현은 다 말하지 못한 사연들을 안고 난폭한 환경에 처해진 채 살아가는 인물인데, 수중에 돈이 있다거나 의지할 만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닌 소현은 늘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관객들은 조심스레 안으로 말린 소현의 어깨에서 그가 제 목소리를 냈다가 그를 못마땅히 여기는 이들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유추해볼 수 있고, 다른 친구들 몰래 초콜릿 사탕을 양 볼에 가득 넣고 혼자 먹어 치우는 장면에서 그가 늘 남들에게 제 것을 빼앗기며 살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유추와 짐작일 뿐이다. 조현훈 감독은 그런 시시콜콜한 전사를 길게 늘어놓으며 소현이 겪은 고통을 전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소현은 남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몰라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해서 이민지는 그 모든 가능성을 소소한 뉘앙스 안에 담아 전달해야 했다.

카메라가 자주 이민지의 얼굴을 화면에 꽉 차도록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소현은 폭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출팸(가출 청소년과 패밀리의 합성어. 가출 청소년들이 자신들끼리 모여 만든 열악한 수준의 경제생활 공동체)의 리더 병욱(이석형)과 이야기할 때에는 눈빛을 던졌다가 금세 거둬들이며 고개를 안으로 만다. 말투 또한 행여 상대에게 불손해 보일까 안으로 수그러든다. 이런 종류의 인물과 정면으로 부딪혔다가는 어떤 위해를 입을 것인지 소현은 정확하게 알고 있고, 이민지는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삼가는 태도 하나만으로 암시한다. 나경(박경혜)이 발로 어깨를 툭툭 차며 일어나라고 채근할 때, 깨어 있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현의 표정은 피로와 체념으로 가득하다. 이런 장면들을 소현이 자신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다 믿은 가출팸 동료 대포(박강섭)에게 제 안전을 위탁하려 애원하는 대목과 비교해 보면 디테일의 차이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소현은 조금은 더 명확하게 제 의견을 던지고 조금은 더 오래 눈빛을 준다. 여전히 상대가 자신에게서 애정을 거둘까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편하게 다가가도 된다는 감정이 그 찰나의 뉘앙스 안에 숨어 있다.

볼 때마다 아직 이 배우를 다 알지 못한다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큰 기복 없이 다양한 인물을 천연덕스레 연기해내는 이민지의 연기력이다. 웹드라마 <게임회사 여직원들> 화면 갈무리

무채색 같은 연기

이민지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매혹적인 인물 제인으로 분한 구교환의 신들린 듯한 연기에 찬사를 보내는 동안, 구교환은 이민지의 연기를 두고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기”라고 극찬했다. 그건 이처럼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행동들을 가지고도 정확하게 감정을 담아내는 이민지의 디테일한 연기에 대한 언급이었을 것이다. 터덜거리지만 어딘가 즐거운 듯한 걸음걸이로 제인의 뒤를 따라 이태원 골목길을 내려가는 소현의 걸음걸이 하나로, 이민지는 제인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싶어하는 소현의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해낸다. 모든 것을 잃고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억새풀을 헤치며 냇가를 걷는 후반부의 장면이나, 영화 앞뒤로 반복되는 결연한 표정의 달리기 장면처럼 그 어떠한 대사나 눈물도 허락되지 않은 순간에도 이민지는 소현의 먹먹한 감정을 옮겨내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작고 소소한 뉘앙스마저 크고 선명하게 담아낼 수 있는 건, 이민지가 하얀 캔버스나 스크린처럼 배우 본인의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을 만큼 순백한 얼굴과 담백한 연기톤을 지닌 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특징 없는 얼굴과 어떠한 어젠다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보는 이들을 방심케 하고, 그 틈을 노려 어떠한 감정이든 투사해내는 이민지였기에.

각종 인터뷰에서 이민지는 여전히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때로는 독보적인 이미지를 지닌 동료들을 부러워하다가도, 어딜 가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무채색 같은 자신의 얼굴이 자산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과 <꿈의 제인>을 모두 목격한 이들이라면 이제 알 것이다. 이민지는 어딜 가나 무난하게 어울리는 수준에 그치는 얼굴이 아니라, 그 어떤 작고 사소한 감정조차 선명하게 보여주는 압도적인 순백의 스크린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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