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8 22:29
수정 : 2017.08.18 22:3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아이슬란드 드라마 <트랩트>
아이슬란드의 작은 항구 마을, 젊은 연인이 사랑을 나누던 외딴 창고에 갑자기 불이 난다. 여자는 끝내 창고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숨지고, 혼자 살아남은 남자는 방화죄 혐의로 감옥에 간다. 7년 뒤, 항구로 들어오던 어선이 협만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 올린다. 머리와 팔, 하반신이 없는 토막 사체였다.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는 좀처럼 벌어지기 힘든 토막 살인 사건에 주민들은 공포에 떤다.
사건을 담당한 안드리(올라퓌르 다리 올라프손) 형사는 사체가 항구에 정박해 있던 덴마크 여객선에서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선박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선장은 선내 수사를 거부하고, 냉동고 고장으로 시체를 식품 저장실에 보관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에서 파견된 과학수사대는 기상 악화로 공항에서 발이 묶인다. 안드리 포함, 단 세명의 경찰이 덴마크 정부가 승인한 3일 내에 사건 조사를 마쳐야만 한다.
<트랩트>는 아이슬란드의 시골 마을에서 발견된 토막 사체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음모를 파헤치는 범죄수사물이다. 수사극에서 흔히 기대하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나 속도감 있는 추리 대신 북유럽산 누아르 특유의 정적이면서도 서늘한 분위기로 악을 탐구하는 묘미가 압권이다. 7년의 시차를 두고, 크게 연관이 없어 보였던 사건들을 정교하게 배치하고 그 이면에 더 진한 인간의 상처와 드라마,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사회적 우울까지 직조해내는 플롯의 재미가 상당하다. 가령 극의 중심을 이루는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찾기 플롯이 진행되는 한편, 과거의 방화 사건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안드리의 가족드라마가 동시에 조금씩 전개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게 만든다. 방화 사건의 희생자는 안드리의 큰딸이고 사건의 후유증으로 안드리와 아내는 별거 중이며 장인은 방화범에 대해 비정상적인 집착을 지니고 있다. 초반만 해도 이 가족드라마적 갈등은 부차적으로 보이지만, 극의 핵심 미스터리가 풀리는 시점에 이르면 결국 이 인간들 사이의 긴장감이 극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트랩트>의 비극 이면에는 과거 경제불황으로 국가부도 사태 직전에 이르렀던 아이슬란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때 유럽을 지배한 부동산 거품(버블)에 편승해 급성장을 이뤘던 아이슬란드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최근 국가신용등급이 상승하는 등 어느 정도는 정상궤도에 올랐지만 아직까지도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같은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다. <트랩트>는 그 불황의 충격이 작은 시골의 지역공동체까지 파괴할 정도로 심각했음을 증명하는 절망의 보고서 같은 작품이다. 외환위기로 인해 가족과 공동체가 해체되고 무한경쟁 시스템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도 친숙한 주제다. 범죄수사물 장르로서의 재미와 사회극적인 성격의 조화로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격찬받은 수작이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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