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05 14:51
수정 : 2017.09.05 15:21
[씨네21]
400년 전 조선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2017년 서울에서 눈을 뜬 사람을 기겁하게 하려면 무엇을 먼저 보여주는 게 좋을까? tvN <명불허전>은 어의 허준(엄효섭)의 추천으로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할 기회를 얻었으나 실수를 하고 관군에 쫓기던 혜민서 의원 허임(김남길)을 현재의 서울로 불러들였다.
모전교에서 화살을 맞고 떨어진 허임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정신을 차린 곳은 2017년의 청계천. 조선시대 사람이니까 종로의 빌딩과 자동차, 과거와 다른 옷차림을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한복을 차려입은 흑인과 백인 관광객이 한국말로 “괜찮아요?” 하고 말을 거는 장면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터졌다. 처음부터 자극이 너무 세잖아!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워낙 많다보니 흥미도 떨어지고 이야기의 흐름도 짐작을 벗어나지 않지만 <명불허전>의 허임이 겪는 현대의 풍경은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막연한 고층 빌딩보다 서린동과 무교동의 낙지음식점 간판처럼 구체적인 장소와 이미지는 허임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시청하는 쪽의 실감을 일깨운다.
또한 허임이 모전교를 기점으로 5리가 되지 않는 거리를 가늠해가며 당도한 을지로의 혜민서 터 표지석 앞에서 400년의 시간차를 깨닫는 장면은 허임의 조선 위에 우리가 인지하는 지리적 감각을 한겹 얹고 좌표를 일치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인물의 시선과 감각에 동조하게 되면, 종합병원 응급실 복도를 두리번거리다 나사 빠진 표정으로 천장형 에어컨 바람에 이끌리는 별거 아닌 모습에도 격한 웃음이 터지게 된다. 천연덕스럽게 허임의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 하는 김남길도 새삼 감탄스럽다.
글 유선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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