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11 07:00
수정 : 2017.09.11 11:10
비싼 커피 구매 “스튜핏”
적금 넣고 절약하면 “그뤠잇”
‘김생민표’ 절약 삶 대중들 환호
성실한 방송 태도와 맞물려
데뷔 25년 만에 ‘제1의 전성기’
경제 불안 속 ‘욜로’ 열풍 피로감
“티끌 모아 태산 희망찾기 국면”
그것은 전조였을까. 2년 전 어느날 <한국방송>(KBS) 1층 로비에서 인터뷰차 김생민을 만났다. 당시 초면이었던 그에게 “커피 드실래요?”라고 묻자 선뜻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으레 오가는 “아, 제가 살게요” 같은 공방도 없었다. ‘듣던 대로 알뜰하구나’ 생각하며 쿠키까지 샀다. 그땐 몰랐다. 이 모든 것이 몸소 보여준 ‘생민라이프’의 핵심포인트라는 것을. 커피는 누가 사줄 때 마시는 것이고, 배도 안 고픈데 접대성으로 쿠키까지 산 나는 ‘스튜핏!’이었다.
눈앞에서 목격한 ‘생민라이프’가 2년이 지난 지금 열풍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지만, 연예계 생활 25년간 유지해온 근검절약의 삶이 2017년 갑자기 화려한 티브이 속 풍경을 점령했다. 사람들은 아끼는 그의 인생을 ‘생민라이프’라 칭하며 환호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팬카페가 생기고, 그의 조언대로 적금을 든 이도 늘어났다. “나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사람들이 더 많이 웃어주고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25년간 가만있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거냐”며 본인도 어리둥절해한다. 늘 그랬던 그의 인생은 왜 지금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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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의 영수증> 인기가 김생민을 향한 관심으로 ‘생민라이프’ 열풍은 예능 프로그램 <김생민의 영수증>(한국방송2 토 밤 10시45분)의 선풍적인 인기와 맥을 같이한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프로그램의 참신한 포맷이 화제를 모으면서, 자연스레 김생민의 삶이 부각됐다”고 말했다. 방송에선 연예계 대표 ‘알뜰맨’ 김생민이 시청자가 보낸 한달간 영수증을 분석해 재무상담을 해준다. 15분으로 총 6회 방송하는데 지난달 19일 1회가 나가자마자 화제를 모았다. 시청률도 2~3%에서 계속 오르고 있다. <김생민의 영수증>을 홍보하는 틱톡의 권영주 대표는 “15분 짧은 방송이 반응이 너무 뜨거워 우리도 놀라고 있다”고 말했다. 월 290만원을 버는 여성의 영수증을 분석해 마트는 한달에 두번만 가라, 한달에 110만원을 저축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에, 자격증을 따고 주변에 밥을 사자 “좋은 일도 침묵하라”는 재치를 더해 정보와 재미를 잡았다. 영수증 검토 등 서민들이나 챙기는 줄 알았던 것의 가치에 공감하고, 알뜰하게 사는 사람들을 응원한다는 점 등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합리적인 소비를 하면 ‘그뤠잇’(훌륭하다), 불필요한 돈을 쓰면 ‘스튜핏’(어리석다)이라고 하는 말도 유행어가 됐다.
원래 팟캐스트 <송은이·김숙 비밀보장>의 한 꼭지로 지난 6월부터 선보이던 것을 티브이용으로 만들었다. <김생민의 영수증>을 제작하는 몬스터유니온의 서수민 이사는 “송은이, 김숙과 웹예능을 해보려고 기획하던 중에 ‘김생민의 영수증’을 알게 됐다. 콘텐츠도 있고 현실적인 내용이 좋았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의 생각, 가치관을 얘기하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기존 예능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위한 폭로성이 강한 것과 달리, 김생민이 살아온 투철한 삶의 방식을 말하고, 소신대로 조언하는 등 ‘생각’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다르다. 반응이 뜨거워서 편성시간을 30분으로 늘리고 방송을 이어갈 것을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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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을 환호하는 시대 케이블의 한 예능 피디는 “<김생민의 영수증>이 몇년 전에 나왔더라면 조용히 묻혔을 것”이라고 했다. 프로그램에서 촉발된 ‘생민라이프’ 열풍은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린 결과라는 것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은 사람들이 다 돈이 없다. 수입이 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 ‘소비를 줄여가면서 사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문제의식이 공유됐다. 그런 가운데 조금씩 돈을 모아 목돈을 마련한 김생민의 인생이 참고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생민뿐 아니라 <미운 우리 새끼>(에스비에스) 등에서 소개된 이상민의 절약하는 생활 등을 ‘궁셔리’(궁상+럭셔리)라고 부르며 환호하는 것 역시 어려운 시대에 나처럼 아끼는 이들을 응원하는 목소리에 가깝다. <라디오 스타>(문화방송)에서 김구라가 김생민의 절약 방식을 구두쇠라고 몰아세우자 시청자들이 하차 서명까지 벌이며 분노한 이유도 “김생민의 삶과 내 삶을 동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에 인기를 끈 ‘욜로’ 열풍에 대한 피로감 역시 김생민 바람의 배경이 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2000년대 초중반 ‘웰빙’ 열풍이 불면서 잘 먹고 잘 사는 삶에 주목했던 대중문화는 이후 <삼시세끼>(티브이엔)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을 벗삼은 일상을 동경하는 ‘힐링’에 관심을 가졌다. 경제가 급속히 어려워지고 희망이 사라진 최근에는 한 번 사는 인생, 미래는 생각 말고 오늘을 즐기자는 ‘욜로’ 열풍이 불면서 여행프로그램 등이 줄을 이었다. 황진미 평론가는 “돈이 없으면 욜로도 불가능하다. 아껴서 잘살자는 회귀는 욜로 열풍에 대한 피로감과 반발심에서 비롯됐다. 드물기는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 될 수 있다는 걸 보며 약간의 절망 상태에서 묘한 희망찾기 같은 국면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지출을 줄여 적은 수입으로 현재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가에 고민이 커진 상황에서 김생민의 컨설턴트가 흥미를 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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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긴 인생’의 롤모델 김선영 평론가는 “시대가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김생민이라는 개인을 상대로 한 호감에서 비롯된 현상이기도 하다”고 했다. 김생민은 방송에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끼라고 조언하지만 시청자들은 어려운 후배를 위해 목돈을 마련해줬다는 등의 미담을 퍼나르며 김생민을 단순한 ‘자린고비’가 아닌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1992년 데뷔 이후 받은 출연료를 모두 저금했다고 한다. 그렇게 10년 동안 1억원을 모았고, 2002년 처음 대출을 끼고 집을 샀다. 집값이 오른 이유도 있지만, 2007년 10억원을 모은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푼돈 모아 목돈을 만드는 전략처럼 그의 가늘고 긴 인생 역시 어려운 시대의 ‘롤모델’로 꼽힌다. 김생민은 데뷔 이후 두각을 나타내는 프로그램 없이 21년째 <연예가 중계>(한국방송2), 20년째 <출발! 비디오여행>(문화방송)과 17년째 <동물농장>(에스비에스)에 출연하고 있다. 패널 또는 보조진행자 등으로 활동을 이어온 게 경력의 전부이지만, 성실한 자세로 출연 프로그램이 모두 장수했다. 그와 <연예가 중계>에서 7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이승훈 프리랜서 피디는 “시상식 등 힘든 현장을 가거나 여장 등 선배 연조가 되면 잘 하지 않으려는 제작진의 다소 무리한 요구도 묵묵히 수행한다.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충실하게 하는 성실함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말했다. 김생민은 2년 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성실하다’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으면 고마워서 그 말이 어깨를 눌러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며 “부각되고 싶지도 않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최근 쏟아지는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에게 시청자들은 말한다. 돈이든 일이든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당신은 “그뤠잇!”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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