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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7 20:04 수정 : 2017.11.17 22:5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그레이스>

1843년 11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토머스 키니어와 그의 정부 낸시 몽고메리가 그 집에서 일하던 하인 제임스 맥더멋과 하녀 그레이스 마크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특히 세간의 시선은 그레이스 마크스에게 집중됐다. 흔치 않은 ‘여성 살해범’인데다 열여섯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 때문이었다. 제임스 맥더멋이 즉각 교수형에 처해진 것과 달리 그레이스 마크스는 살해 과정의 역할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지난주 넷플릭스가 공개한 오리지널 드라마 <그레이스>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성 범죄자”라는 그레이스 마크스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96년 발표해 큰 호평을 거둔 소설을, 같은 국적의 유명 감독 겸 배우 세라 폴리가 각색했다. 드라마는 원작처럼 그레이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지 16년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한다.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에드워드 홀크로프트)은 그레이스 마크스(세라 가돈)가 누명을 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사면위원회의 후원을 받고 무죄를 뒷받침할 보고서를 위해 그녀를 만난다. 실제로 본 그레이스는 악명과 다르게 선량해 보이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조던은 그녀의 ‘진정성 넘치는’ 고백에 점점 빠져들며 의사로서의 냉정한 판단과 연민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드라마는 조던의 변화하는 감정을 따라가면서 그 위에 다양한 관점의 사건 기록을 배치해 그레이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가를 두고 시청자들과 치열한 진실게임을 벌인다. 수많은 기사들, 법정진술서, 목격자의 증언, 제임스 맥더멋의 상반된 진술, 조던을 향한 그레이스의 고백, 그레이스의 마음속에서 재연되는 기억의 파편 등 사건을 둘러싼 여러 층위의 이야기 중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끝까지 긴장을 놓기 어렵다. 상처 입은 소녀의 얼굴과 잔혹한 살인마의 얼굴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표정을 소름끼치게 표현해내는 세라 가돈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레이스의 유죄 여부가 아니다. 그 수많은 말들에 가려진 드라마의 진짜 주제는 오히려 그레이스가 끝까지 ‘수수께끼’의 존재로 남아 남성 중심의 독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데 있다. 그동안 여성은 너무도 쉽게 규정되어 왔다. 창녀 혹은 성녀, 엄마 혹은 딸. 그레이스가 죽은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다시 집을 떠날 때 어린 여동생이 그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처럼 고유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에게 부과되는 의무로서만 존재한다.

그레이스는 바로 이 ‘여자의 숙명’을 가장 파괴적인 방법으로 거스르며 기꺼이 ‘공포의 대상’이 됐다. 하녀로서 자신의 주인을 살해하고, 사악한 마녀 아니면 무고한 천사로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역이용해 생존을 모색한다. 그레이스의 맨얼굴에 가장 근접한 모습이 있다면 마지막 회에서 여성들의 억압의 역사에 대한 응축된 분노를 토해내는 최면술 장면일 것이다. 가히 압권이며, 더 나아가 올해 최고의 드라마 속 명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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