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방송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
11월11일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이 출범했다. 국내 1만여명의 방송작가들 중 50명(가입 절차 완료)에서 100여명(가입 의사 전달)이 창립 조합원으로 모여 “우리도 노동자”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국내 방송작가들의 노동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출범 특집 드라마’를 썼다. 조합원 각자의 경험을 한데 모은 뒤 세 명의 작가(메달리스트 김·송작가·노작가)가 대표 집필했다. 11월21일 주요 방송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미지 지부장(왼쪽 셋째)과 이향림 사무국장(넷째)을 제외한 조합원들은 불이익을 우려해 큐카드로 얼굴을 가렸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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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들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고소득에 폼나고 대접받는 ‘작가 선생님들’은 소수일 뿐입니다. 드라마, 보도, 시사교양, 예능, 라디오 등 방송 전 분야에서 작가들은 대본 쓰기는 물론 출연자 섭외부터 최종 편집까지 제작의 전 과정을 연결하고 조율하며 소통합니다. ‘잡가’로 불릴 만큼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면서도 ‘노동자의 기본 권리로부터는 한참 먼 세상’에서 한국의 방송작가들은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실제 겪은 사례들을 모아 직접 고발극을 썼습니다. 지금부터 ‘방송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시작합니다.
지쳐 잠든 사이 다가온 이 부장
송충이 손으로 깍지 끼고 볼 만지고
작가 생사여탈 쥔 방송사 간부·피디
옥상서 수십미터 아래 내려다보며 눈물 드라마 13년차 최현옥
유명 드라마 메인작가 작업실에서
‘선생님’ 온갖 수발드는 보조작가
하루 쉬고 싶다는 말에 바로 해고
계약서 무시 업계 관행에 속수무책 예능 신입 유민영
쓰면 노예계약, 대부분 구두계약
해고되거나 ‘일방 종영’ 당해도
밀린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노동청 신고하면 “노동자 아니라…” #1 이승과 저승 사이 김민주, 32살, 시사교양 7년차 <케이엠에스>(KMS) 방송사 옥상.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오는 민주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괴로워한다. 거친 심호흡이 잦아들자 민주가 낮은 소리로 운다. 30분 전 방송국 안 다큐멘터리 편집실. 편집 영상을 보며 내레이션 대본을 쓰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바람에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민주.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떠보니 바로 옆에서 이 부장(CP)이 느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놀란 민주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이 부장은 민주의 손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힌다. 어느새 민주의 손은 이 부장의 손에 깍지 껴졌다. 검고 긴 털이 나 송충이 같은 이 부장의 손. 소름 돋은 민주가 몸서리치며 황급히 손을 빼낸다. 그러자 이 부장은 민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마치 정해진 순서인 것처럼 망설임이 없다. “편하게 해. 마감 때문에 고생 많은 거 내가 다 알지.” 이 부장의 노골적인 행동에 민주는 당황해서 얼어버린다. 성희롱 대처법은 여성이 다수인 방송작가 모임에서 자주 공유해온 주제였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질 뿐이다. 동료 작가들의 경험담이 민주의 귓가에 맴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기에 나도 팔을 들어서 아예 어깨동무를 해줬어.’ ‘손을 하도 쓰다듬고 주무르기에 모기 잡는 척하며 옆에 있던 원고로 손등을 때렸어.’ ‘당장 뺨을 때리고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게 급해 조용히 경고하는 걸로 끝냈는데,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분해.’ ‘나한테 미운털 박히면 니 밥줄은 끝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지 싶다니까.’ 계약직조차 되기 힘든 방송작가는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말 한마디에 바로 실업자가 된다. 고용과 해고는 너무 쉽고, 억울한 해고를 당해도 제대로 항의할 수조차 없다. ‘갑’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다음 편성에서 하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종 업계 매장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작자들 모임에서 ‘그 작가, 지독히 말 안 듣지’ ‘능력도 없잖아’ 등의 헛소문이 퍼지면 변명할 기회도 없이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만다. 민주는 ‘지금까지 버텨온 걸 생각해서라도 현명하게 대처하자’며 스스로를 타이르고 이 부장의 손을 조용히 물린다. 그 순간 그녀의 오른쪽 볼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 “내가 우리 민주를 참 예뻐해. 다른 제작사로 가도 데리고 갈 거야, 알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민주가 버럭 소리친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민주. 당연한 대응이었지만 두려운 마음이 뒤따른다. 뒤에서 들려오는 이 부장의 목소리. “어이구! 장난이야. 뭘 그렇게 놀라.” 화장실로 뛰어든 민주는 비누를 집어 볼이 닳도록 박박 문지른다. 민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렇게 캄캄한 옥상으로 올라온 민주는 난간에 기댄 채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그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자 끝내 흐느끼고 만다. 휴일은커녕 일주일에 사나흘은 잠도 못 자고 일하고, 변덕스러운 담당 피디 비위 맞추느라 이리저리 끌려다녔는데. 프리랜서라면서도 어쩌다 집에 다녀오면 허락 없이 자리를 비웠다고 혼나고, 제작진이 다 보는 가운데 시청률이 안 좋다며 면박당하고, 밥조차 눈치 보며 먹었는데. 한참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던 민주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변한다. 빌딩 아래에서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저 아래는 여기보다 편할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민주. 10년 전이었나. 한 방송사 옥상에서 뛰어내린 작가가 있었다. ‘여기서 한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될 만큼 이승과 저승은 가까운 건가. 그 작가도 이러다 한 발짝을 내민 걸까.’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민주. “아~ 교수님. 죄송해요. 편집이 좀 늦게 끝나서요. 제가 지금 바로….” 민주가 서둘러 사무실로 내려간다.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국의 방송작가들은 계약서와 무관하게 해고되고, 노동청에 부당노동행위를 신고해도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다’란 반응을 들어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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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비판 아이템 다뤘다고 해고
정권 교체 뒤 ‘색깔 맞춘다’며 폐지
방송장악 저지투쟁 피디와 같이해도
피디는 ‘파업’, 작가는 ‘그냥 쉰 것’ 보도 10년차 김보현
면접서 받은 첫 질문 “결혼했어요?”
“임신 가능성 없으면 합격”이란 말에
자리 털고 일어서다 본 면접관의 배
항의하자 “저는 정규직이잖아요?” 노조 출범식에 모인 작가들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 장소 찾아온
전국의 민주·현옥·민영·선희·보현‘들’
지금과는 다른 세상 위해 한목소리
‘잡가’ 아닌 당당한 ‘작가 노동자’ 선언 #3 노예 계약? 그냥 구두계약! 유민영, 27살, 예능 신입 민영은 드디어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케이엠에스>에 예능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외주제작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드라마 보조작가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민영. 친구는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려준다. “계약서 쓰지 마. 완전 노예계약이야.” 계약서에 사인해야만 일할 수 있다면 어떡하지? 밤새 고민 끝에 처음 출근한 민영.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처음 받아든 건 계약서가 아니라 출연자 섭외 목록이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저, 계약서는 언제 쓰나요?” 망설이다 던진 질문에 제작사 대표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얼굴로 말한다. “뭐? 계약서? 가족 같은 사이에 그런 걸 왜 써? 믿음으로 일해야지.” 민영은 ‘그나마 노예계약서는 쓰지 않았다’고 위안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일을 그만둔 뒤 일어났다.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종방’ 통보를 한 날, 민영은 바로 일자리를 잃었다. 퇴사 후 한달이 넘도록 마지막 월급이 입금되지 않는다. 망설이고 고민하다 결국 담당 피디에게 전화를 건다. 의외로 피디는 순순히 밀린 월급을 입금해주겠다고 한다.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기다려보는 민영. 또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는데 월급은 감감무소식이다. 오만가지 불길한 생각과 상상이 꼬리를 물던 중 민영은 쓸 만한 조언을 얻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임금체불 신고센터’라는 게 있단다. 거기에 신고하면 해결될 거라는 선배의 조언.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전화를 거는 민영. 센터에서 돌아오는 말에 마음이 시리다. “돈은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계약서가 없으니까요. 다만 저희 원에서 공모하는 사업에 해당 제작사가 공모하면 마이너스 3점을 부여합니다.” 일한 노동의 대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니! 청와대 신문고에라도 글을 올려야 하나. 억울한 마음을 안고 한강에 몸을 던져야 하나. 절망의 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민영에게 희망을 준 건 동생 녀석이다. “누나, 노동청 있잖아. 신고해봤어?” 민영은 해야 할 말을 정리해 노동청에 전화한다. 통화음이 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린다. 그리고 시작된 대화. “방송작가요? 근로계약서 있어요?” “아뇨.” “4대 보험은 가입돼 있어요?” “아뇨.” “그럼 휴대폰 문자로라도 ‘얼마에 일하자’ 이야기한 거 있나요?” “아뇨.” 계속되는 상담사의 질문에 민영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돌이켜보니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민영은 늘 ‘네’였다. “너 그거 할 수 있겠어?” “네.” “밤새 큐카드 다 만들 수 있어?” “네.” “취재원 설득할 수 있겠어?” “네.” “몰카 들고 모텔 들어갈 수 있겠어? 원조 교제 콘셉트로?” “네???”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들에도 민영은 항상 “네! 맡겨만 주세요”라고 했다. 노동청 상담사의 마지막 답변은 이렇다. “아, 죄송한데 윗분들에게 여쭤보니,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저희 관할이 아니라네요. 문화체육관광부나 방송통신위원회에 문의하세요.” 방송계 관행이라고 해서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해온 민영에게 이제는 ‘계약서 안 쓴 사람이 바보’라며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단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내가 노동자가 아니었다니! 민영은 찬바람에 눈물을 하염없이 떨군다. 그래도 민영은 오래 꿈꿔온 방송작가 일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주먹 쥐고 불끈! 그래, 액땜 세게 했으니 이제 더 좋은 방송사와 더 착한 피디를 만나게 되겠지. 이런 아픔쯤은 젊어서 겪는 시행착오라고 생각하자, 그래그래, 그럴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민영.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보니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던 서브작가 선배다. “막내야, 나랑 일할래?” 민영은 다시 그렇게 ‘막내’가 된다.
11월11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린 방송작가유니온 창립대회에서 이미지 지부장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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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 테이블에 방송작가의 현실을 고발하고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하는 큐시트를 펼쳐놓고 단어를 고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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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과 대본, 수첩, 필기도구 등으로 가득한 방송작가의 책상.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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