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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5 13:35 수정 : 2017.11.26 15:55

[토요판] 커버스토리
방송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

11월11일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이 출범했다. 국내 1만여명의 방송작가들 중 50명(가입 절차 완료)에서 100여명(가입 의사 전달)이 창립 조합원으로 모여 “우리도 노동자”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국내 방송작가들의 노동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출범 특집 드라마’를 썼다. 조합원 각자의 경험을 한데 모은 뒤 세 명의 작가(메달리스트 김·송작가·노작가)가 대표 집필했다. 11월21일 주요 방송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미지 지부장(왼쪽 셋째)과 이향림 사무국장(넷째)을 제외한 조합원들은 불이익을 우려해 큐카드로 얼굴을 가렸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방송작가들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고소득에 폼나고 대접받는 ‘작가 선생님들’은 소수일 뿐입니다. 드라마, 보도, 시사교양, 예능, 라디오 등 방송 전 분야에서 작가들은 대본 쓰기는 물론 출연자 섭외부터 최종 편집까지 제작의 전 과정을 연결하고 조율하며 소통합니다. ‘잡가’로 불릴 만큼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면서도 ‘노동자의 기본 권리로부터는 한참 먼 세상’에서 한국의 방송작가들은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실제 겪은 사례들을 모아 직접 고발극을 썼습니다. 지금부터 ‘방송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시작합니다.

시사교양 7년차 김민주
지쳐 잠든 사이 다가온 이 부장
송충이 손으로 깍지 끼고 볼 만지고
작가 생사여탈 쥔 방송사 간부·피디
옥상서 수십미터 아래 내려다보며 눈물

드라마 13년차 최현옥
유명 드라마 메인작가 작업실에서
‘선생님’ 온갖 수발드는 보조작가
하루 쉬고 싶다는 말에 바로 해고
계약서 무시 업계 관행에 속수무책

예능 신입 유민영
쓰면 노예계약, 대부분 구두계약
해고되거나 ‘일방 종영’ 당해도
밀린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노동청 신고하면 “노동자 아니라…”

#1 이승과 저승 사이

김민주, 32살, 시사교양 7년차

<케이엠에스>(KMS) 방송사 옥상.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오는 민주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괴로워한다. 거친 심호흡이 잦아들자 민주가 낮은 소리로 운다.

30분 전 방송국 안 다큐멘터리 편집실. 편집 영상을 보며 내레이션 대본을 쓰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바람에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민주.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떠보니 바로 옆에서 이 부장(CP)이 느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놀란 민주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이 부장은 민주의 손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힌다. 어느새 민주의 손은 이 부장의 손에 깍지 껴졌다. 검고 긴 털이 나 송충이 같은 이 부장의 손. 소름 돋은 민주가 몸서리치며 황급히 손을 빼낸다. 그러자 이 부장은 민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마치 정해진 순서인 것처럼 망설임이 없다.

“편하게 해. 마감 때문에 고생 많은 거 내가 다 알지.”

이 부장의 노골적인 행동에 민주는 당황해서 얼어버린다. 성희롱 대처법은 여성이 다수인 방송작가 모임에서 자주 공유해온 주제였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질 뿐이다. 동료 작가들의 경험담이 민주의 귓가에 맴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기에 나도 팔을 들어서 아예 어깨동무를 해줬어.’

‘손을 하도 쓰다듬고 주무르기에 모기 잡는 척하며 옆에 있던 원고로 손등을 때렸어.’

‘당장 뺨을 때리고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게 급해 조용히 경고하는 걸로 끝냈는데,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분해.’

‘나한테 미운털 박히면 니 밥줄은 끝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지 싶다니까.’

계약직조차 되기 힘든 방송작가는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말 한마디에 바로 실업자가 된다. 고용과 해고는 너무 쉽고, 억울한 해고를 당해도 제대로 항의할 수조차 없다. ‘갑’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다음 편성에서 하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종 업계 매장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작자들 모임에서 ‘그 작가, 지독히 말 안 듣지’ ‘능력도 없잖아’ 등의 헛소문이 퍼지면 변명할 기회도 없이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만다.

민주는 ‘지금까지 버텨온 걸 생각해서라도 현명하게 대처하자’며 스스로를 타이르고 이 부장의 손을 조용히 물린다. 그 순간 그녀의 오른쪽 볼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

“내가 우리 민주를 참 예뻐해. 다른 제작사로 가도 데리고 갈 거야, 알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민주가 버럭 소리친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민주. 당연한 대응이었지만 두려운 마음이 뒤따른다. 뒤에서 들려오는 이 부장의 목소리.

“어이구! 장난이야. 뭘 그렇게 놀라.”

화장실로 뛰어든 민주는 비누를 집어 볼이 닳도록 박박 문지른다. 민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렇게 캄캄한 옥상으로 올라온 민주는 난간에 기댄 채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그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자 끝내 흐느끼고 만다.

휴일은커녕 일주일에 사나흘은 잠도 못 자고 일하고, 변덕스러운 담당 피디 비위 맞추느라 이리저리 끌려다녔는데. 프리랜서라면서도 어쩌다 집에 다녀오면 허락 없이 자리를 비웠다고 혼나고, 제작진이 다 보는 가운데 시청률이 안 좋다며 면박당하고, 밥조차 눈치 보며 먹었는데.

한참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던 민주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변한다. 빌딩 아래에서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저 아래는 여기보다 편할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민주. 10년 전이었나. 한 방송사 옥상에서 뛰어내린 작가가 있었다. ‘여기서 한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될 만큼 이승과 저승은 가까운 건가. 그 작가도 이러다 한 발짝을 내민 걸까.’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민주.

“아~ 교수님. 죄송해요. 편집이 좀 늦게 끝나서요. 제가 지금 바로….”

민주가 서둘러 사무실로 내려간다.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국의 방송작가들은 계약서와 무관하게 해고되고, 노동청에 부당노동행위를 신고해도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다’란 반응을 들어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 “하루 쉬고 싶어? 당장 짐 싸!”

최현옥, 38살, 드라마 13년차

<케이엠에스> 근처 작업실. 컴퓨터 앞 책상에서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는 현옥. 유명 드라마 메인작가 선생님과 한 공간에서 일하는 걸 영광으로 알며, 현옥은 10년 넘게 드라마 일을 해온 경력도 내려놓고 선생님의 보조작가로 1년 동안 일하고 있다.

현옥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식사를 챙겨드리며, 대본에 쓰일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작업실에서 선생님과 합숙을 하는 현옥.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선생님께 문안 인사를 건네고, 드시고 싶은 음식을 준비한다. 오늘의 메뉴는 갈비탕. 식사 주문을 받은 현옥은 발소리조차 대본 집필하시는 데 방해될까 종종걸음으로 작업실 밖으로 나온다. 밥을 사러 나오는 때가 하루 중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다. 햇살이 나무를 비추자, 나뭇잎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하~. 작업실 안을 가득 채운 담배 연기 속을 벗어나니, 도심 속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 든다. 그것도 잠깐. 어김없이 울리는 선생님의 문자.

“7회 대본에서 남자 주인공이 회사 얘기를 했니?”

갈비탕 봉투를 받아든 현옥은 한 손으로 간신히 선생님께 답문자를 보낸다. 선생님께서 배가 많이 고프실까 걱정하며 작업실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밤 10시까지 8회 대본에 들어갈 ‘신 작업’(보조작가들이 스토리를 신(scene) 단위 나눠 대본화하는 초벌 작업)을 마무리해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영 촉박하다. 이 업무야말로 현옥이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라 초집중해서 글을 쓰는데, 다시 쏟아지는 선생님의 호출 문자들.

“과일 깎아줘” “아이스커피” “은행 좀 다녀와야겠다” “담배 사다줘” “오늘 저녁엔 김치찌개 끓여먹자”….

선생님 수발을 들면서 내주신 숙제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어느덧 밤 12시. 오늘은 선생님께서 특별히 집에서 자고 오라며 ‘무려’ 퇴근을 시켜주신다. 일주일만의 퇴근길이라 꾀죄죄한 추리닝 차림에도 마냥 신나 버스정류장으로 날 듯이 뛰어간 현옥. 하지만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통곡하듯 울어대는 전화기.

“맥주 좀 사다줘.”

버스 막차를 눈앞에서 그대로 보낸 현옥은 모든 게 허무해진다. 지나가는 차들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

‘확 저 차도에 뛰어들어버릴까?’

가장 하고픈 일을 하기에 복 받은 삶이라 믿었던 현옥. ‘나는 어쩌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현옥의 뺨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뒤 맥주를 사서 들어간 현옥에게 선생님이 다그친다.

“왜 늦었어?”

현옥은 그만 눈물을 보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빨리 얘기 안 해?”

“죄송합니다. 저 혹시 내일 하루 쉬어도 괜찮을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걸까. ‘쉬고 싶다’는 말은 보조작가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됐어! 더 말할 것도 없어. 당장 짐 싸서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메인작가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현옥은 해고를 당한다.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책상 서랍을 열자 깊숙이 넣어둔 ‘드라마 보조작가 용역계약서’가 보인다. 일을 하려면 무조건 사인해야 했던 계약서. 월급은 120만원. 계약 기간은 계약 체결일부터 드라마 방송 종료일까지. 업무시간을 규정하는 조항은 아예 없다. 그런 계약서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건 선생님의 “나가라”는 말씀 한마디. 그렇게 흘러온 드라마판의 관행에 현옥은 어쩔 수 없이 계약서를 조용히 가방에 넣는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작업실을 나와 택시를 잡아탄 현옥.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한번 쉬어보는데 오늘따라 새벽바람이 유독 차다. 어디서도 위로받지 못한 채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엄살 같기만 했던 시간들이 가슴에 사무친다. 허망하게 일자리를 잃은 현옥은 자신의 꿈조차 빼앗긴 것만 같아 괴롭고, 괴로움을 나눌 사람 없이 혼자란 생각에 외롭다.

라디오 15년차 강선희
정권 비판 아이템 다뤘다고 해고
정권 교체 뒤 ‘색깔 맞춘다’며 폐지
방송장악 저지투쟁 피디와 같이해도
피디는 ‘파업’, 작가는 ‘그냥 쉰 것’

보도 10년차 김보현
면접서 받은 첫 질문 “결혼했어요?”
“임신 가능성 없으면 합격”이란 말에
자리 털고 일어서다 본 면접관의 배
항의하자 “저는 정규직이잖아요?”

노조 출범식에 모인 작가들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 장소 찾아온
전국의 민주·현옥·민영·선희·보현‘들’
지금과는 다른 세상 위해 한목소리
‘잡가’ 아닌 당당한 ‘작가 노동자’ 선언

#3 노예 계약? 그냥 구두계약!

유민영, 27살, 예능 신입

민영은 드디어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케이엠에스>에 예능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외주제작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드라마 보조작가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민영. 친구는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려준다.

“계약서 쓰지 마. 완전 노예계약이야.”

계약서에 사인해야만 일할 수 있다면 어떡하지? 밤새 고민 끝에 처음 출근한 민영.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처음 받아든 건 계약서가 아니라 출연자 섭외 목록이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저, 계약서는 언제 쓰나요?”

망설이다 던진 질문에 제작사 대표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얼굴로 말한다.

“뭐? 계약서? 가족 같은 사이에 그런 걸 왜 써? 믿음으로 일해야지.”

민영은 ‘그나마 노예계약서는 쓰지 않았다’고 위안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일을 그만둔 뒤 일어났다.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종방’ 통보를 한 날, 민영은 바로 일자리를 잃었다.

퇴사 후 한달이 넘도록 마지막 월급이 입금되지 않는다. 망설이고 고민하다 결국 담당 피디에게 전화를 건다. 의외로 피디는 순순히 밀린 월급을 입금해주겠다고 한다.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기다려보는 민영. 또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는데 월급은 감감무소식이다. 오만가지 불길한 생각과 상상이 꼬리를 물던 중 민영은 쓸 만한 조언을 얻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임금체불 신고센터’라는 게 있단다. 거기에 신고하면 해결될 거라는 선배의 조언.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전화를 거는 민영. 센터에서 돌아오는 말에 마음이 시리다.

“돈은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계약서가 없으니까요. 다만 저희 원에서 공모하는 사업에 해당 제작사가 공모하면 마이너스 3점을 부여합니다.”

일한 노동의 대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니! 청와대 신문고에라도 글을 올려야 하나. 억울한 마음을 안고 한강에 몸을 던져야 하나. 절망의 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민영에게 희망을 준 건 동생 녀석이다.

“누나, 노동청 있잖아. 신고해봤어?”

민영은 해야 할 말을 정리해 노동청에 전화한다. 통화음이 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린다. 그리고 시작된 대화.

“방송작가요? 근로계약서 있어요?”

“아뇨.”

“4대 보험은 가입돼 있어요?”

“아뇨.”

“그럼 휴대폰 문자로라도 ‘얼마에 일하자’ 이야기한 거 있나요?”

“아뇨.”

계속되는 상담사의 질문에 민영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돌이켜보니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민영은 늘 ‘네’였다.

“너 그거 할 수 있겠어?”

“네.”

“밤새 큐카드 다 만들 수 있어?”

“네.”

“취재원 설득할 수 있겠어?”

“네.”

“몰카 들고 모텔 들어갈 수 있겠어? 원조 교제 콘셉트로?”

“네???”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들에도 민영은 항상 “네! 맡겨만 주세요”라고 했다. 노동청 상담사의 마지막 답변은 이렇다.

“아, 죄송한데 윗분들에게 여쭤보니,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저희 관할이 아니라네요. 문화체육관광부나 방송통신위원회에 문의하세요.”

방송계 관행이라고 해서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해온 민영에게 이제는 ‘계약서 안 쓴 사람이 바보’라며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단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내가 노동자가 아니었다니! 민영은 찬바람에 눈물을 하염없이 떨군다.

그래도 민영은 오래 꿈꿔온 방송작가 일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주먹 쥐고 불끈! 그래, 액땜 세게 했으니 이제 더 좋은 방송사와 더 착한 피디를 만나게 되겠지. 이런 아픔쯤은 젊어서 겪는 시행착오라고 생각하자, 그래그래, 그럴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민영.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보니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던 서브작가 선배다.

“막내야, 나랑 일할래?”

민영은 다시 그렇게 ‘막내’가 된다.

11월11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린 방송작가유니온 창립대회에서 이미지 지부장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4 파업 노동자도 못 되는 방송작가!

강선희, 41살, 라디오 15년차

출산 뒤 A방송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 시사작가 선희는 오랜만에 하는 일들이 꽤나 즐겁다. 선희는 A방송사 라디오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제작진에 합류해 뜨거운 이슈들을 마이크 앞으로 데려왔다.

촛불이 매일 광화문을 뒤덮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 하나로 모아진 국민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강 작가, 이리 와봐.”

부장의 호출이다.

“니가 쓴 저 멘트가 여당 의원을 바보로 만든 거 알아?”

“제가요? 광우병 쇠고기 따위는 없다며, 미국산 쇠고기를 날걸로 먹는 시범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거 아닌가요?”

“이거 안 되겠구만,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여당 문광위(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간사야. 곧 문광위원장 될지도 모르는 분인데, 그런 분 심기를 건드려?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선희는 억울함이 북받친다. 아무리 서슬 퍼런 정권 초기라고 해도 정규직 피디라면 이렇게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할까.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 하나.

그래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 노동조합을 찾아간 선희. 정부와 여당 의원을 비판하는 원고를 썼다는 이유로 해고된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노조 상근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 죄송한데, 저희는 정규직 노조라…. 작가님 같은 비정규직 문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요.”

A방송사에서 잘린 선희가 두번째로 자리 잡은 곳은 B방송사 라디오 아침 뉴스브리핑 프로그램이다. 진보와 보수 양쪽의 목소리를 균형감 있게 전달한다는 평가를 얻는다. 첫 해고로부터 4년 뒤 대선 정국이 시작되자 각 매체의 지형은 둘로 나뉜다. 여당 대선 후보를 노골적으로 미는 이쪽과 야당 대선 후보를 옹호하는 저쪽 간에 언론 공방이 치열하다. 선희는 두 후보를 검증하는 기사를 골라 철저한 분석과 함께 매일 시청자에게 전한다. 그렇게 대선이 끝나자 또다시 부장의 호출이 시작된다.

“강 작가, 최근 2주 동안 H신문과 K신문 기사만 유독 많이 뽑았던 거 알아?”

“그때마다 부장님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뭐가 잘못됐나요?”

“암튼 됐고. 이제 새 정권이 들어섰잖아. 우리 회사 기조도 180도 달라졌어. 그래서 오늘부로 프로그램은 폐지야. 미안하게 됐네.”

막 출범한 정권은 방송국 사장과 간부부터 물갈이하며 매체를 장악해나갔다. 정권의 치부를 파헤친 시사보도 프로그램 제작진은 해고나 지방 발령이 내려지고, 그들은 파업투쟁으로 맞선다. <케이엠에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으로 옮겨온 선희도 날마다 투쟁이다.

“강 작가! 이 사람 빼고 저 사람 섭외해줘.”

“패널 간 균형이 맞지 않아 토론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텐데요.”

“뭐 이렇게 말이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좀 해!”

위에서 내려오는 간섭은 아이템 선정부터 패널 섭외, 원고 검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일방적이다. 20년간 음악프로그램만 진행하다 온 피디는 정치에 별 관심도 없고 위에서 지시하는 안전하고 단순한 아이템만 요구한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면 뭘 하라고? 시청자는 허수아비야? 우리가 누굴 위해 방송을 만드는데.”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폐지 논의까지 나오자 선희와 다른 작가들도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거리로 나간다.

“방송탄압 금지” “공영방송 쟁취” “김○○은 물러나라”….

시간이 지나자 함께 싸운 피디들은 하나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선희와 작가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강 작가, 그 얘기 들었어? 우리 자리를 ‘용체’(용역업체·일종의 작가 에이전시) 사람들로 채웠대.”

“뭐라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게다가 진짜 이상한 일이 있어. 우리는 피디들과 같이 파업을 했는데 우린 파업에 동참한 게 아니었대.”

“뭔 말장난?”

“파업은 노동자가 하는 건데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니까 파업한 게 아니래.”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뭘 한 건데?”

“그냥 쉰 거래.”

기막힌 일이다. 방송작가도 분명 제작진이고 똑같이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니. 선희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같은 처지의 작가들과 ‘진짜 우리 노조’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한다.

11월21일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 테이블에 방송작가의 현실을 고발하고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하는 큐시트를 펼쳐놓고 단어를 고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5 “불임이면 합격”

김보현, 35살, 보도 10년차

<케이엠에스> 안 커피숍.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10년 넘게 해온 보현이 새 일을 찾아 면접을 보는 자리다.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여기자.

“이력서 잘 봤어요. 이력은 마음에 드니까 물어볼 게 없고. 궁금한 게, 결혼했어요?”

첫 질문이 결혼 얘기라니. 보현도 처음 겪는 일이다.

“네, 결혼했습니다.”

순간 미간을 찡그리는 면접관.

“우리는 미혼을 더 선호하는데. 결혼한 지 몇년이나 됐어요?”

“5년 정도요.”

주부 대상 교양프로그램이거나 육아프로그램도 아니고 뉴스 작가를 구하는데 결혼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 불쾌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그럼 아이는요?”

“없습니다.”

“갖고 싶은데 없는 거예요, 아님 가질 생각이 없는 거예요? 혹시 불임?”

아무리 면접이라 해도 무례함이 도를 넘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나 저나 아이를 원치 않아서요. 그런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럼 혹시 일하다 임신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임신중절 서약이라도 하라는 뜻일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려는 순간 기자의 한마디가 이어진다.

“전임이 애 핑계로 일에 집중하지 못했거든요. 툭하면 애가 아프다, 애 봐줄 사람이 없다. 이해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우리 입장에선 솔직히 아무나 써도 되는 프리랜서 작가인데 굳이 애 있는 사람이나 임신 가능성 있는 사람을 뽑을 이유가 없잖아요. 불임이라서 앞으로도 임신할 가능성 없으면 내일부터 나와서 일하셔도 돼요.”

이쯤 되면 견적이 나온다. 일한다 해도 몇개월 안에 안 좋은 소리 들으며 일방적으로 해고될 가능성 100%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면접이라는 생각에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배. 만삭의 임신부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신이 아찔해진다.

“저, 그런데 기자님, 본인이 지금 만삭이잖아요. 기자님은 아이를 가져도 괜찮지만, 같이 일하는 작가가 그러면 불편해서 싫다는 생각이 좀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으세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저는 정규직이잖아요.”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흐르는데, 띠리릭~, 여기자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잠시만요. 응? 방송작가 노조? 작가들이 노조도 해요?”

당황하며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보현이 더 어리둥절해진다.

‘작가노조?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하긴 내 뒤에 노동조합이 있다면 면접관이 저런 막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텐데. 적어도 사람 취급은 했겠지.’

“그럼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부디 순산하세요.”

밖으로 나온 보현이 휴대전화로 ‘방송작가 노조’를 검색한다. 표정이 밝아진다.

노트북과 대본, 수첩, 필기도구 등으로 가득한 방송작가의 책상.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6 방송작가도 노동자다!

출범식에 모인 작가들

11월11일 ‘빼빼로데이’ 오후 1시. ‘1’이 5개 모인 시각. 민주, 현옥, 민영, 선희, 보현이라는 5명의 ‘1들’이 전국언론노조 사무실(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18층)로 들어선다. 전국에서 모인 1명씩의 방송작가가 5명이 되고, 10명이 되고, 50명이 되고, 100명이 되며….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이 시작된다. 누구보다 방송을 사랑하고 프로그램 제작에 자부심을 가진 작가들이 기대와 궁금함을 안고 노조 출범을 지켜본다. 박원순(서울시장), 송영길(더불어민주당 의원),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 노정렬(방송인) 등 각계각층에서 보낸 축하영상이 상영된다. 예상을 뛰어넘는 가입 문의에 모두가 놀란다.

하나의 글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뉴스로 보도되고, 시사와 교양을 전달하고, 예능으로 대중에게 웃음을 선물하며, 드라마가 되어 감동을 주는 모든 과정에 방송작가가 있다. ‘갑들’의 한마디에 통째로 흔들렸던 ‘방송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시청자들도 ‘방송다운 방송’을 누릴 수 있다고 작가들은 믿는다. 노조 탄생과 동시에 방송작가들도 자신의 노동자됨을 위해 함께 싸울 동지들을 갖게 됐다. ‘그들이 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위해 작가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화장실에서 울지 말고 노조에서 폼나게 웃자!”

메달리스트 김·송작가·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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