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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1 10:54 수정 : 2018.04.01 18:29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12 ‘안기부 사건’ (상)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1년 서울 정동에 있던 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제1공화국> ‘6·25 특집-오판’ 편을 녹화하던 중에 연행된 고석만은 남산 안기부 5국의 지하 취조실에서 4박5일간 조사를 받았다. 풀려난 뒤에야 알게된 ‘5국 별관’은 옛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간첩조작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곳이었다. 사진은 지난해 해체 때 드러난 ‘안기부 제6국’ 지하 고문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1년 6월 ‘여간첩 김수임’ 방영 직후
제작국장실 불려가니 ‘검정 정장’ 2명
연행당하는 줄 모르고 탤런트들은 인사

남산 1호터널 입구 안기부 별관 5국
지하계단 내려가니 철창문 스르륵
그제야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구나”

1981년 6월께 <제1공화국> ‘제13화 오판’의 녹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제작국장으로부터 ‘잠깐 보자’는 전갈을 받았다. 국장석의 칸막이를 돌아 들어서니 넥타이 없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 정장 차림의 두 사내가 좁은 국장석을 꽉 채우고 앉아 있었다. 국장은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앞의 두 사람만 힐끔힐끔 보며, “…좀 다녀오지”. 직감으로 알았다. 안기부다.

‘제12화 여간첩 김수임’ 편이 나가고 안기부에서 조사가 들어 왔었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터라…, 순간 ‘대수롭지 않게 굴자’는 생각에 “녹화 다 끝나가는데, 끝내고 가죠” 했다. 그 둘은 서로 눈치를 보고, 국장은 둘을 번갈아 보고, (사이) 한 사내가 앞에 있는 유선전화를 돌린다. (사이) 전화 끊으며 “지금 가죠.” 제작국장은 아무 말 못 하고 눈만 꿈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팔짱만 끼지 않았지, 둘은 내 양쪽에 밀착해 3층에서 2층 계단으로, 또 1층으로, 사람들은 말없이 스쳐 지나고, 아역 배우 이승현도 꾸벅 인사하며 지나고, 정문 경비도 일상적인 경례를 하고, 거대한 문화방송 건물도 그대로 서 있는데, 난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 가고 있었다.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1981년 6월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제12화 여간첩 김수임’(왼쪽 사진)이 방영된 직후 연출가 고석만, 작가 김기팔, 드라마반장 표재순은 남산에 있던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고석만 피디는 이른바 ‘안기부 사건’의 내막을 37년만에 털어놓았다. 문화방송 제공

현관 옆 검정 포니까지 아무 말 없이 와 섰다. 운전사가 시동을 걸고, 예의라 생각하여 앞자리 옆문을 여는데 쓰윽 밀며 뒷자리에 앉으란다. 그러고는 가운데로 앉히며 양쪽에 그 둘이 앉는 게 아닌가? 이게 뭔가? 차가 출발하고 침묵 속에 광화문을 지나 동아일보사 골목길을 빙글 돌아서 청계천 쪽으로 향할 때, 내 오른쪽 사내가 툭 한마디 했다. “주민등록증!” 차가 청계1가 신호에 걸렸을 때, 양쪽에서 힘껏 내 고개를 가랑이 사이로 처박는 것이 아닌가? ‘아, 끝이로구나. 이러면 이민도 못 가고, 배추 장사라도 하면 먹고야 살겠지?’

신호를 받아 차는 다시 움직였다. 고가로 올라서는 압력이 일고, 잠시 뒤 우회전으로 쏠리고, 또 진행하다 선다. 클랙슨 한번 빵, 무릎 사이로 빼꼼히 보니, 육중한 철문이 가로막혀 있고, 철문 밑에 송곳 같은 장애막 사이로 군화가 지나가더니 손바닥만한 쪽문이 열렸다 닫히곤, 철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차는 올라타듯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고개는 다시 눌려졌다.

중앙정보부에서 이름 바꾼 ‘안기부’
기무사 ‘한수산 필화’ 맞서 충성경쟁
부장 유학성은 고석만 복무했던 사단장

핏자국 얼룩진 네평 조사실 문틈새
“고석만이 뭘 알아? 내가 쓴 건데!”
김기팔 작가 당당한 목소리 ‘거인’

그다음 상황부터는 발설하지 않기로 서약서에 두 번 세 번 날인한 터라, 지금껏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 묻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인은 그렇게 길들여져 있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그러나 35년이 지나 공소시효도 지났고, 그 장소도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고 모두 공개되었는데, 거리낌 없이 밝혀도 잡아가진 않겠지?

1981년 안기부는 <제1공화국> ‘여간첩 김수임’편에서 간첩 사건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미화했다는 구실로 제작진을 연행했다. 김수임(정애리·왼쪽)과 이강국(현석·오른쪽)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흐르는 카페에서 이강국의 월북을 앞두고 이별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문화방송 제공

그곳은 바로 남산, 1호터널 입구 안기부 제5국 별관, 중구 예장동 11번지였다. 철문을 지나 우측으로 좌측으로 또 우측으로 진행한 뒤 차가 서니 “내려!” 또 한마디뿐이었다.

5층은 넘을 듯한 빌딩의 뒤꼍, 지하층으로 향하는 좁은 계단으로 10걸음쯤 밀려서 내려서니, 철창문이 전동으로 지르르 열리고 앞에 또 철문, 오른쪽에 두뼘 남짓한 수부의 쪽문이 열릴 때, 들어왔던 뒷철문은 지르르 닫히고, 날 끌고온 두 사내가 내 주민등록증을 수부 쪽문에 내던지니, 그때 안에서 들리는 소리. “고석만 103호!” 내 방이 사전에 배정된 정황이 느껴지며, 일순 비장해졌다.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 첫째 날

6m 폭의 복도는 전체 길이 50m쯤 될까? 조용하고 칙칙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창이 없다는 것. 가운데에 독서실처럼 눈높이 칸막이가 된 책상 3개조. 왼쪽 구석에 1인용 야전침대 그리고 욕조와 세면기가 전부였다. 전체를 방음벽으로 둘러싼 네 평짜리 네모방이다.

우선 소지품을 모두 꺼내놓으라 한다. 담배가 두 갑 반 나오는 걸 본 한 사내가 “길게 잡고 왔군” 하는 것이다. 녹화날이면 담배를 네 갑씩 사들고 시작한다. 보통 두 갑은 녹화 중 줄담배로 날려보내고, 한 갑은 스태프들 피우라고 부조탁자 위에 펼쳐 놔두고, 한 갑은 예비로 호주머니에 있어야 한다. ‘길게 잡고 왔다니?’ 내 소지품을 모두 모아 들고 그들은 나갔다.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1분, 2분, …10분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앉아 있다는 게 못 견디겠다.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함인가? 이들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1981년 6월 고석만이 기관원들의 포니 승용차에 실려 들어간 남산 1호터널 오른편의 ‘안기부 제5국 별관’. 1995년 안기부가 서초구로 이전한 뒤 지금은 서울시 남산1청사로 쓰이고 있다. 어딘지도 모른 채 끌려갔던 고석만은 육중한 철문 열리는 소리고만 기억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들은 얼마 전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 즉 ‘안기부’로 개칭하고, 안기부장에 유학성 예비역장군이 입성했다. 유학성은 내가 일등병 달고 26사단 근무할 때 사단장이었다. 12·12 쿠데타 멤버. 얼마 전 기무사에서 <중앙일보> 연재소설을 걸어 ‘한수산 필화사건’을 터트렸다. 중앙일보 문화부 데스크 정규웅 부장도 조사를 받았는데, 술집 갔을 때 옆에 앉아 서빙해준 여종업원 이름까지 들먹이며 압박하더라는 얘기를 건네 들은 터라, 최근 기관의 사찰이 강화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기무사’와 ‘안기부’의 충성게임! 지금 그 진행 상황이란 말인가?

그때 왼쪽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대여섯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맨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좀 전에 방송사에서 날 데리고 온 그 사내다. 지휘봉을 들고 첫마디가 “일어서 인마!” 일어섰다. “이 자식, 정신 못 차렸네?” 다섯명이 삥 둘러서고…. “너 인마 이것도 안 보여?! 핏자국, 발자국!” 둘러보니 방음벽 군데군데 흔적이 보였다. 그때 “옷 벗어 인마!” 웬 서류뭉치로 내 배를 툭 찔렀다. 아팠다. 그리고 점퍼를 벗었다. 티셔츠도 벗으란다. 벗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 벗겼다. 완전 나체가 되었다.

“앉아!” 앉았다. “일어서!” 일어섰다. 벌거벗고, “앉아, 일어서!” ‘앉, 일, 앉, 일…’ 따라 했다. “앉, 일, 앉, 앉… 어? 이 새끼 봐라! 한국말도 몰라?” “너 김일성이 누구야?” “김일성은 북한의… 북한 공산당의 수령으로서…” “뭐? 북한?” “북한 공산당의…” “뭐? 북한?” 한마디를 반복했다. 그 이유를 몰랐다. 열댓번 반복한 뒤, 그들이 기다리는 답이 나왔다. “북괴”, “괴뢰집단”, “빨갱이”.

그러곤 백지 한 뭉치가 책상에 던져졌다. 8절지 300장 정도. “이강국이가 누구야? 아는 대로 써!” 그렇게 소리 지른 사내는 휭~ 바람처럼 나갔다.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벌거벗겨져 있다.

‘말할 수 없는 수치심 속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을 때, 삶과 죽음의 고통스러운 경계에서, 자연스레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여덟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가와 넓은 치마로 크게 감싼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그때, 앞자리의 차석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옷 입으세요”. 이 수치심과 공포, 이후의 정체성에 고민했다. ‘사람답게 살자.’ 주섬주섬 옷을 꿰차고 나자 질문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부터 가족관계 확인 작업이었다. 공무원 아버지와 연세대 교수였던, 작고한 작은아버지의 6·25 때 피난처를 확인하고자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일이라 했더니, 나이로 보아 그렇겠다며, 다음 가족사항을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다. 길진 않았지만 꼼꼼하다. 이 모든 준비가 하루이틀에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질서 있는 질의응답은 거의 없다. 책상에 놓인 백지에 모든 걸 쏟아놓게 한다. 어찌 보면 꽤 과학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아는 대로 써라!” 이강국, 김수임, 박헌영, 김일성, 김책, 8월 테제, 조만식…. 이승만, 김구…. 손가락이 아플 만큼 많이 썼다. 쓰고 나면, 걷어간다. 좀 미진하다 싶으면 더 쓰게 한다. 이들이 나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바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내 눈에 띄지 않는 분석팀이 어딘가 있다. 그들은 가끔 두뇌게임을 하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질문이 내려오기도 하고 몇걸음 앞지른 생각이 내려오기도 한다. 몇시간을 꼼짝 않고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고문이었다.

1981년 6월 <제1공화국> ‘안기부 사건’ 때 안기부장 유학성(오른쪽)은 고석만이 육군 일등병 시절 복무했던 제26사단의 사단장이었다. 80년 7월18일 전두환(왼쪽) 중앙정보부장 서리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꾸고 기무사와 충성 경쟁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 둘째 날

남산 지하실에 들어가서 꼬박 이틀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글만 쓰게 했다. 식판에 날라다 주는 끼니를 때우면서 그 숫자를 셀 뿐이었다. 첫날 사상검증, 둘째 날도 사상검증,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이 써댔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어느 순간 양철지붕에 우박 쏟아지 듯 때려대는 타자기들의 발광 같은 소리였다. 족히 50여명의 소리가 20여분간 이어진다. 그 시간엔 감시하는 한 명만 빼고 모두 타자기 소리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안기부의 보고서가 대한민국의 아침을 깨운다 하지 않던가. 그 시절 ‘대통령의 제1보’는 ‘안기부 보고서’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은 한 조에 여섯 명씩 배치해 놨었다. 김기팔·표재순·고석만은 같은 층 옆방 옆방인데, 하나의 질문이 상부에서 내려온다. 지금은 기획단계를 추궁하는 것이다. 질문은 돌아서 나에게 온다. 옆방에서 어떻게 답변하는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또 무슨 추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마다 반응이 조금 다르다.

어떤 때는 김기팔 선생의 목소리가 열린 문 사이로 넘어오기도 했다. “고석만이가 뭘 알아?!” “내가 썼어, 내가 쓴 건데!” 그들이 이리저리 공격을 달리해도 김기팔 선생은 초지일관이었다. 그는 불의 앞에 당당했고 우뚝 맞서 있었다. 그 무더운 여름의 지하실에서 한 마리의 북극곰을, 한 마리의 포효하는 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는 거인이었다.

옆방인데도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우연의 일치로 화장실 소변대 앞에서뿐이다. 선생은 뻘건 눈에 부은 얼굴이다. “표재순이 왜 무릎 꿇고 있어?” 나도 지나오다 열린 문 사이로 그 모습을 보고 서글펐다. 화장실에 따라온 요원 한 명이 픽 웃으며, “못 본 척하세요. 딴 껀이에요.” 다른 건이라니? 안기부 소관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 무릎을 꿇린 것인가.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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