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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8 09:29 수정 : 2018.04.08 09:42

1981년 6월 <제1공화국> 고석만 연출과 김기팔 작가, 표재순 드라마반장은 안기부 남산 별관 지하실로 끌려가 불법 구금당한 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는 고석만에게 특히 ‘제12화 여간첩 김수임’ 편에서 ‘마지막 사형 장면 때 왜 김수임(정애리)에게 소복을 입혔느냐’ ‘왜 화면의 색조를 다르게 처리했느냐’는 식의 꼬투리를 집중적으로 잡았다.(왼쪽 사진) 문화방송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⑬ ‘안기부 사건’(하)

1981년 6월 <제1공화국> 고석만 연출과 김기팔 작가, 표재순 드라마반장은 안기부 남산 별관 지하실로 끌려가 불법 구금당한 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는 고석만에게 특히 ‘제12화 여간첩 김수임’ 편에서 ‘마지막 사형 장면 때 왜 김수임(정애리)에게 소복을 입혔느냐’ ‘왜 화면의 색조를 다르게 처리했느냐’는 식의 꼬투리를 집중적으로 잡았다.(왼쪽 사진) 문화방송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1년 6월 <제1공화국> 제작진 3명이 남산에서 조사받던 사흘째 이른바 ‘5공 실세’였던 문화방송 사장 이진희와 안기부장 유학성이 만났고 그 이틀 뒤 제작진은 풀려났다. 사진은 1983년 7월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영전’한 이진희(오른쪽)를 반공연맹 이사장이 된 유학성(왼쪽)이 장관실로 예방한 모습이다.(오른쪽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 셋째 날

뒷날 들은 얘기지만, 1981년 6월 <제1공화국> ‘여간첩 김수임’ 방영 직후 작가·연출가·드라마반장이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던 그때 문화방송 이진희 사장은 유학성 안기부장을 만났다. 우리 사건과 관계없이 미리 점심 약속을 해뒀다지 않은가? 용의주도함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분기점이었다.

그럴 즈음 우리 집에도 연락이 닿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야…. 매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매형도 문화방송 보도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걱정되어 위로차 전화를 해준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한다. 이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뒤늦게 온 집안에 난리가 났다. 늘 며칠씩 밤새워 일하고 들어와 옷만 갈아입고 또 촬영하러 나가는 게 피디 직업이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왜 그랬을까? 드라마국의 대다수는 비정치적이다. 파업이나 노사분쟁 때도 현장을 지키는 집단이다. 드라마는 제작 여건상 파업에 돌입해도 결방에 이르기 힘든 구조다. 드라마는 여러 작업 주체가 참여하는 콘텐츠다. 외주로 이뤄질 때는 더욱 그렇다. 모두가 독립된 개체들이다. 영역과 경계가 분명하다. 그 벽을 뛰어넘는 사람은 연출자밖에 없다. 옆 파트의 작업을 존중하는 뜻에서 서로 신경 끊고 지낸다. 윗사람이나 심의실 등 주변에서 드라마에 손질을 하는 것은 자식에게 생채기를 내는 행위라 생각하여 괴로워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동료가 부당하게 정보기관에 끌려간 상황에서, 드라마국의 침묵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기현상이다. 그때 <제1공화국>은 드라마국의 다른 피디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우리가 연행된 첫날, 드라마국의 몇몇이 모여 걱정도 하고 푸념도 늘어놨는데, ‘속수무책’이란 말로 의견이 모아지더니 귀가했단다. 이런 비상 상황을 처음 맞이했기 때문이라 체계도 없고 경황도 없었겠지만,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에게 알리면 놀랄까봐 연락조차 안 했다니. 이틀째에도 종무소식이었다니 허탈할 뿐이다. 더구나 사흘째 밤엔, 녹화 끝난 기념으로 쫑파티 술판을 벌인 선배도 있었단다.

어린 시절 10대 초반 여름방학 때였다. 시골 할머니집 앞 골목 미나리꽝 옆. 그날은 주룩주룩 장맛비가 오고 있었다. 어쩌다가 사촌형은 동네의 또래 성규와 시비가 붙었고, 싸움으로 번졌다. 성규는 사나웠다. 빗속에서 그 동생 한규까지 형제가 손에 사금파리(깨진 항아리 조각)를 든 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사촌형은 물러나지 않고 싸울 태세다. 그때 나는 비를 피해 옆 처마 밑으로 뒷걸음치며 “성, 싸우지 마! 싸우지 마!”만 반복하고 있었다. 끝내 싸움이 시작되고, 난 안절부절못하고…, 한두 합을 겨룰 때 마침 동네 어른이 지나치다 형제에게 무섭게 야단을 쳐서 말렸다. 싱겁게 끝났다. 사촌형의 뒤를 따르며 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1981년 6월 남산 안기부 연행 사흘째
이진희 사장-유학성 안기부장 만나

문화방송 동료 피디들 ‘이상한 침묵’
“가족들 걱정할까봐 알리지 않았다?”
뒤늦게 기자한테 전해들은 가족들
방송사 앞 다방에서 기약없이 ‘대기’

드라마 시사한 수사관들 ‘연출’ 겨냥
“왜 간첩을 인간적으로 보이게…” 윽박

‘절대 함구하라’ 서약서 수십번 쓰고
4박5일 만에 풀려나 돌아온 방송사
이 사장 “제작국장이 갔어야 했는데”

그날 이후 난 진정한 용기, 의리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삶 앞에, 문제 앞에 용기 있게 서는 사람이다. 그 깨달음을 나름 평생을 견지하며 살아왔다.

아내는 매형 일행과 함께 방송사로 찾아와 울며 하소연했다고 한다. 갈아입을 옷이라도 전해달라며, 보따리를 들고 와 조연출인 황인뢰에게 간절하게 부탁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라도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내 일행은 소식을 기다리며 회사 앞 황실다방에서 밤낮없이 내내 죽치고 있었단다.

1981년 6월 남산 안기부 별관 5국으로 연행된 연출자 고석만에게 수사관들은 ‘여간첩 김수임’ 편에서 ‘왜 당대 최고 인기 탤런트(현석과 정애리)를 주인공으로 기용했느냐’ ‘왜 간첩들의 연애를 아름답게 묘사했느냐’ 등등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해 ‘사상검증’을 시도했다. 문화방송 제공

남산에서는 사흘째 점심 이후부터 조사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대본을 통해서만 분석하고 해석하더니 이들이 브이티아르(VTR) 녹화테이프를 시사한 뒤, 모든 시선과 질문이 연출자에게 집중되었다.

왜 대본에 없는 장면이 들어갔느냐? 왜 간첩을 인간적으로 그렸느냐? 왜 사형장에 하얀 소복을 입고 가게 했느냐? 왜 당대 최고 인기 탤런트를 기용했느냐? 왜 김창룡과 수사관들 배역은 비(B)급 배우를 썼느냐? 왜 마지막 총살 장면의 화조를 변조시켰느냐? 등등, 끝없이 들이대는 게 아닌가? 초점은 반공이다. 일일이 차분하게 조목조목 설명했다. 온종일 기가 질리게 윽박을 해댔다. 녹초가 되었다.

1981년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여간첩 김수임’편에서 50년 3월 육군 정보국장 겸 특무부 대장 김창룡(김기일·왼쪽 둘째)과 수사관(신충식·맨 왼쪽) 등이 김수임 체포작전을 짜고 있는 장면이다. 남산 안기부 조사 때 고석만을 담당한 최고참 수사관은 실제로 김창룡의 부하였다며 ‘왜 비(B)급 배우를 썼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문화방송 제공
조사실에선 정식으로 취침 시간이 없다. 그저 잠이 오면 끄덕이며 졸 뿐이다. 오늘은 눈만 감으면 졸음에 빠진다. 한쪽 입구에 놓인 일인용 야전침대에 잠깐만이라도 누워 자봤으면…, 그 일인용 침대는 최고참 수사관의 전용이다. 그는 자신이 김창룡의 부하였다고, 김창룡을 따라다니면 모두가 떨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 밤 11시 수사관들은 모여 야참을 즐긴다. 그때 튀김닭이라도 나올라치면 한두 조각을 슬쩍 주기도 했다. 이곳 수사관은 3개의 방을 총괄하는 고시 출신 과장 외에, 방마다 정규 기수의 요원 1명, 일반수사관인 고문기술자 4명, 특무상사 격인 김창룡부대 출신 수사기술자까지, 신구 세대의 묘한 조합이다. 방마다 6명이 교대로 감시하고 취조한다. 사흘쯤 지내다 보니 얼굴도 익히고 성씨도 알게 되었다.

책임자 P 과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내가 김지하 담당이야.” “내가 김지하를 스타 만들어주었어.” “김지하는 여기를 다녀가면, 발언 수위가 한 단계씩 높아지더라고.”(당신은 김지하를 놓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나라도 그리되었을 것이오.)

그날 저녁 식판을 비우고 얼마쯤 지났을 때, 생각지도 못한 대학 동창생 R이 불쑥 들어왔다. 지키고 있던 수사관과는 가볍게 목례를 나눌 뿐 말이 없더니 내게 다가와 “잘 지내십니까?” “건강은?” 등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마디 하면서, 내 책상 위 백지에 조그맣게 “내일 나간다” 끄적이듯 쓰고 나갔다. 나는 순간, 그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살짝 찢어서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그 친구가 나가는 문소리가 나자마자 수사관은 스프링처럼 튀어와 내 책상을 점검하더니 흔적이 안 보이자, “잘 알아요?” 하며 다그쳤다. 정말 잘 모른다고, 대학 교정에서 스친 문예창작과 교우라고, 몇년 전 공항 검색대에서 우연히 봤을 뿐이라고, 이름도 정확히 모른다고, 성만 기억나는 정도라고, 누누이 설명하고, 그리고 지나갔다.

권력의 구조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로구나. 안기부 내부의 묘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화이트칼라의 조정 방식은 달랐다. 끊임없이 글을 쓰게 하고 그 속에서 의식을 포착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인문학적 접근, 서로 다른 메타포와 레토릭, 그것의 낯섦, 신구 세대의 이질감, 기획 파트와 수사 파트의 갈등이 느껴졌다.

◇ 넷째 날

오늘은 논리 싸움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다. 사상검증은 다 끝냈는데, 이제 또 무언가? 정밀 점검이다. 첫번째 소재는 기획 의도, 다음은 제작 방향, 연출 방향, 제작 진행 그리고 지식사회의 반향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 공세를 하고 백지에 답변하길 10시간쯤 했다.

‘드라마 <제1공화국>은 프로파간다의 집결체다.’ ‘<제1공화국>을 통해서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역사 의식을 공고히 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여, 인류 구원 사명 의식을 천명하였다.’ 무엇 하나 그릇된 말이 있는가? 특히 신군부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손해볼 일이 없잖은가?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책임자 과장이 다시 들어온다. 맨 처음 나를 발가벗겼던 그인지라, 그가 오고 가면 또 양상이 달라진다. 그는 책상에 놓인 8절지 백지를 세더니 명령했다. “이 다섯 장 가득, 앞뒤 없이 빼곡히, 네 이력서를 써!”

‘나의 할아버지는 고광필씨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 얼굴도 모르고…’ 그렇게 시작하여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시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꼼꼼히 썼는데도 겨우 앞뒤 한 장이다. 다섯 장을 메운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의 행적이나 심리를 파악하는 수사기법으로 활용하기엔 탁월해 보였다.

그 뒤 문화방송에 입사하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내를 만나고, 이래저래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는 첫딸을 얻었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주연이라 지었다.’ 그런데 주연이라고 쓰는 대목에서 욱하니 감정이 오르고 눈물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모든 생각이 멈췄다.

‘얼마나 자주 하늘을 올려다봐야 사람은 진정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소리쳐야 민주주의를 들여다볼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죽음을 알게 될까. 그것은 바람만이 알 수 있다네.’ 그 밤은 내 인생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깊은 밤이었다.

1981년 6월 고석만의 안기부 연행 사실을 뒤늦게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가족들은 정동 문화방송사 맞은 편 모퉁이 황실다방에서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사진은 82년 무렵 문화방송사 전경.

◇ 다섯째 날

오늘도 안기부의 새벽은 요란한 타자기 소리로 시작한다. 이들의 수사 골격은 일주일 단위에서 보름 단위, 이 기간을 넘기면 삼개월 단위로 넘겨지는 듯했다. 오늘이 금요일, 월요일날 들어왔으니 일주일 단위의 마지막날이다. 오후 들어서며 출감, 나가는 분위기다. 그런데 몇번에 걸친 서약서를 쓰게 한다. ‘이곳에서 알게 된 모든 사항, 위치부터 시작하여 모든 과정은 일체 함구하라’, 어겼을 때의 범법 사항과 형량 등이 빼곡히 적혀 있고, 몇군데 지문 찍고 서명을 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늦은 오후, 지시에 따라 건물을 나서니, 회사의 권효섭 전무와 김민식 총무국장이 우리 셋을 인수하러 승용차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차 한 대에 5명이 타려니 마른 편인 내가 앞자리에 전무와 함께 앉고, 출발했다.

위기감에서 시작한 불법 구금조사는 닷새 만에 ‘혐의 없음’으로 끝이 났다. 무겁게 시작했으면 무슨 결말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요시찰 인물이다. 앞으로 조심하라’는 엄포를 이런 방법으로밖에 못하는가?

그 육중한 철문을 빠져나왔다. 누구도 말이 없다. 차가 남산길을 빠져나갈 때 만감이 교차했다. 좁은 앞자리, 전무는 팔을 넘겨 내 어깨를 감쌌다. 구불구불 정동까지 오는 동안 전무는 나를 꼬옥 감싸 안고 놓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하니 일행은 사장실로 안내되었다. 내 눈에 보이는 회사의 모든 것, 건물, 사람들 모두 새로운데, 아무도 모르는 듯 그대로 스쳐 간다. 다만, 이진희 사장은 달랐다. 깊은 연민이 보였다. 한참을 차만 마셨다. 사장은 그간의 정황을 짧게 얘기하고, 얘기 끝에 제작국장을 날카롭게 힐난했다. “제작국장이 갔다 왔어야 하는 건데….” 정작 제작국장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사장은 한마디 더 했다. “그랬으면 나도 옷 벗는 건데….” 1981년 ‘제1공화국 필화사건’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드라마국에 들러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방송사 정문을 나서는데 맞은편 유진약국 앞에 아내가 서 있다. 막내딸 명선을 포대기에 둘러업고…, 황실다방에서 줄곧 기다린 것이다. 나는 그저 아내와 딸을 꼬옥 안고 한참 서 있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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