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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4 17:40 수정 : 2018.05.04 20:09

[황진미의 TV톡톡] SBS 드라마 ‘엑시트’

SBS 제공

<엑시트>(에스비에스)는 120분 분량의 드라마로,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드라마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는 뇌과학의 설정과 채권추심업자가 등장하는 누아르의 현실을 담는다. 하지만 공상과학이라 하기엔 턱없이 허술하고, 누아르라 하기엔 너무도 상투적이다. 사실 드라마의 장르는 가족극이자 우화이다. 그래서 가족 화해와 부성애에 뭉클했다느니, 가상현실의 행복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감동했다는 등의 호평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지향하는 가족애가 무엇이고, 드라마가 무엇을 비유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수(최태준)가 어렸을 때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갔다. 아버지(우현)는 술에 취해 강수를 때렸다. 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빚 때문에 강수는 황 사장 밑에서 채권추심 일을 하고 있으며,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 강수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는 뇌과학 실험실을 찾지만,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한다. 강수는 계속 엄마를 찾고 있지만, 아버지는 강수가 엄마를 찾으면 자신을 버릴 거란 생각에 정보를 차단해왔다. 요컨대 나쁜 아버지로 인해 강수는 과거, 현재, 미래의 행복을 몰수당한 상태다.

드라마는 서사를 한참 풀어가다 그것이 가상현실임을 알려준다. 즉 강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장면들은 그의 뇌에서 펼쳐지는 소망 충족적 판타지다. 황 사장은 죽고 그의 돈을 탈취한 강수는 사장이 된다. 황 사장의 연인이었던 선영은 강수의 연인이 되어, 며느리 노릇도 잘한다. 삼십년 만에 구원자처럼 엄마 앞에 나타난 강수를 엄마는 단박에 알아본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오순도순 산다. 즉 훔친 돈으로 부자가 된 강수와 아버지가 사는 저택에 선영과 엄마가 무개성의 존재로 들어와 행복을 보충해준다. 워낙 가족애에 굶주렸던 강수이다 보니, 이런 행복을 꿈꾸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강수의 판타지일까.

드라마는 강수의 가상현실 속 행복이 자꾸만 틈입해 들어오는 현실로 인해 교란되는 것을 보여준다. 뇌실험의 위험을 알게 된 아버지가 강수에게 현실로 돌아오라는 강력한 텔레파시를 보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로 인해 지옥 같은 현실을 살게 된 아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행복을 맛보는데, 아버지가 방해하는 형국이다. 이는 마치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게임 세계에 빠진 아들의 방문 앞에서, 게임 폐인이 되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호소하는 아버지의 상황과 비슷하다. 결국 아버지의 눈물 어린 사과가 강수의 무의식에 닿았는지, 강수는 가상현실의 행복을 버리고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깨어난 강수는 실험실의 비상구(엑시트)를 열고 집으로 돌아와, 그토록 소망하던 가족사진을 아버지와 함께 찍는다.

물론 가상의 행복을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와 불완전한 행복이나마 만들어가려는 강수의 결단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족애나 부성애로 포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강수가 현실로 돌아와서 하는 일은 나쁜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수와 아버지가 화해 가능한 관계일까. 부자가 소주잔을 기울이던 장면도 판타지였고, 엄마가 아버지를 용서했다는 장면도 판타지였다. 드라마에서 확인되는 부정은 가상현실로 가버린 아들의 손을 잡고 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뿐이다. 예컨대 현실의 부자 관계는 달라진 게 없는데, 다만 문밖에서 게임 그만하라며 읍소한 아버지의 부정에 감화되어 아버지의 모든 악행을 용서하는 게 가능할까. 어떻게 아버지를 용서했느냐는 물음에 엄마는 “세월이 지나 희미해졌고, 강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까”라 답했다. 이는 강수를 위한 판타지의 세계이니 가능한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강수가 아버지를 쉽게 용서하는 것은 누구의 판타지일까. “세월이 지나 희미해졌고, 아버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까”라는 강수의 답을 듣고 싶은 아버지의 판타지가 아닐까.

사실 드라마 전체가 아버지의 판타지로 가득하다. 학대받던 아들이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으며 병수발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효자 판타지’의 극치다. 영화 <똥파리>에서 학대받던 아들이 채권추심업자로 자란 뒤 아버지를 수시로 찾아가 때렸던 것을 떠올려보라. 드라마에서 가장 어이없는 장면은 아들의 판타지에서 아버지가 유복한 중년 가장 코스프레를 하며 사는 것이다. 과연 학대받던 아들이 이런 행복을 꿈꿀까. 아무리 내가 널 학대했어도, 너는 효자가 되어 나를 잘 봉양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아전인수적 판타지가 아닐까.

강수의 가정은 외환위기 이후 해체된 가족들을 연상시킨다. 당시 해체된 가정의 아이들은 정에 굶주리고 빚에 허덕이는 청년이 되었다. 아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물려주고도 아버지 대접을 바란다면 뻔뻔한 노릇이다. 이는 세대의 문제로 확장된다. 젊은 세대들의 유년을 잘 돌보지 못했고, 빚만 가득한 현실을 물려준 아버지 세대들이 부자유친을 꿈꾸는 것은 파렴치하다. 가족은 여전히 중요하다. 문제는 어떤 가족인가이다. 입양가족, 미혼모 가족, 대안가족 등 사회적 관심을 요하는 많은 가족들이 있다. 이들 중 하필이면 나쁜 아버지와 학대받던 아들이 부자유친을 회복하는 가족우화라니, 가부장적 가족이데올로기로 회귀하려는 퇴행적 움직임에 우려를 금치 못하겠다. 새로운 성정치의 감수성에 저항하려는 ‘백래시’가 심하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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