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5.05 10:58 수정 : 2018.05.06 16:05

[길을 찾아서] 고석만 첨병 (16회) “민나 도로보데스”

1982년 2월 최초의 정치 드라마 <제1공화국>을 끝내자마자 고석만은 최초의 경제 드라마 <거부실록> 연출을 맡았다. 구한말에서 일제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큰돈을 모은 부자 5명의 흥망성쇠를 일대기를 통해 ‘돈’의 의미를 일깨우고자 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2년 2월 <제1공화국>이 주1회 85분씩 39회 방송이 끝이 났다. 곧바로 그 다음주부터 경제 드라마 <거부실록>이 방송된다. 50분짜리 주 2회, 같은 연출자에 의해서 일주일 만에 제작되어 나간 것이다. 1년 동안 5편·105회가 방송된다. 절대후진국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제작 행태다. 방송사의 연출자가 부족한 것이 첫째 이유였지만….

언론학자들이 텔레비전 연출자의 세대 분류를 해놓았다. 기존의 연극 무대에서 옮겨온 연출자를 중심으로 ‘연극의 티브이화’를 선보인 제1세대, <문화방송>(MBC)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1969년 정규공채 피디들이 제2세대, 탈스튜디오를 앞세우고 ‘티브이 리얼리즘’을 구사한 제3세대가 나왔다. 82년은 제3세대의 감각으로 드라마 범람의 시대가 진행중이다.

<거부실록> 5편 가운데 특히 ‘공주갑부 김갑순’ 편은 사회현상과 맞물려 큰 화제를 모았다. ‘땅 투기꾼 1호’인 김갑순(박규채)의 극중 대사 ‘민나 도로보데스’는 때마침 터진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을 계기로 5공화국 비리 세태를 풍자하는 유행어로 널리 회자했다. 사진 박규채씨 제공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문화방송>이 녹화를 가장 빨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시설(스튜디오)은 <한국방송>(KBS)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국방송>에서 일일연속극 6편 녹화를 이틀에 걸쳐 하는데, <문화방송>에서는 하루에 다 끝내야 한다. 초몰입 지경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때의 연기자들의 자세도 달라진다. 작품의 기본부터 진행·탄력·리듬감·속도감·하모니가 다르다. 결국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 ‘문화방송 드라마’가 정립되는 것이다. 훗날 연기자 출연자유화가 실행되면서 방송사 전속 개념이 없어졌지만, <문화방송> 출신 탤런트들은 독특한 연기 패턴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정글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부실록’이다.

<거부실록>은 <제1공화국>에 쏘아대던 정치적 화살을 피하고자 기획된 것이 사실이다. 황금만능 시대에 돈을 좇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심성을 좇는 드라마. 돈을 좇아 돈을 모은 사람들의 모습과 그 돈을 쓰는 모습을 보는 재미와 의미를 보여준다.

1982~83년 경제드라마 ‘거부실록’
‘5편’ 50분짜리 주2회씩 105회 방송
“‘제1공화국’ 정치권 화살 피하고자”

구한말 격변기 큰돈 모은 부자들
돈 모아 나라 위해 쓴 남강 이승훈
돈 모아 학교 세운 보부상 이용익
노예 출신 천만장자 무역왕 최봉준

‘공주갑부 김갑순’ 인기 화제 만발
박규채 해학 넘치는 명연기 ‘햇빛’
“모두 다 도둑놈이다” 유행어 탄생
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전두환 인척’ 5공화국 비리로 흔들

“장덕수·김구에게 독립자금 전달”
‘백산 안희제’는 뜻밖의 고증 논란도

돈을 모아 나라 위해 쓴 선각자 ‘남강 이승훈’(오재호 극본, 김무생 주연), 남보다 빠른 정보로 부동산 재벌이 된 ‘공주갑부 김갑순’(김기팔 극본, 박규채 주연), 빠른 발로 부지런히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운 ‘보부상 이용익’(〃, 이영후 주연),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에 헌납한 ‘백산 안희제’(〃, 오지명 주연), 노예 출신으로 러시아 천만장자로 성공한 ‘무역왕 최봉준’(오재호 극본, 이대근 주연)에 이르기까지, 구한말 이 땅의 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 가장 재미있다고 꼽힌 작품은 단연 ‘공주갑부 김갑순’ 편이고, 의외의 인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은 ‘백산 안희제’ 편이다.

<거부실록> 첫번째 주인공은 돈을 모아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김무생)이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거부실록> 두번째 인물 ‘보부상 이용익’(이영후)은 남강 이승훈의 감화를 받아 역시 모은 돈으로 보성학원을 설립한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거부실록>은 ‘꺼삐딴 최’로 불리며 청·일·러시아를 누빈 ‘무역왕 최봉준’(이대근) 같은, 숨겨진 근대 인물을 발굴했다. 특히 문화방송 탤런트가 총동원됐던 <제1공화국>에 유일하게 빠졌던 이대근은 ‘최봉준’으로 한을 풀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화방송 제공

방송평론가 신규호는 “<거부실록>이 사회적인 화제를 몰고 왔던 것은 드라마의 내용에 잘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프로그램의 특수한 기본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기획 의도를 평가하고 “단순히 남의 사생활이나 들추어 흥미를 제공하는 따위의 오락물이 아닌 수준 높은 문화적 창작 활동으로 공익을 위한 목적으로, 설사 사실에 약간의 윤색이나 과장이 끼었다 치더라도 본질적인 부분에 거짓이 없다면, 또 진실과 다른 소재라 하더라도 그에 관한 확실한 자료나 근거가 있다든지, 그렇게 믿게 된 연유에 과실이 없다면 정당한 작품 활동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희제가 장덕수에게 독립자금을 건넨 장면이나 제3자를 통해 김구에게 거금을 건넨 장면의 시시비비에 대한 논평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을 조달한 ‘백산 안희제’(오지명·오른쪽)는 백범 김구(이영후·왼쪽)와 더불어 ‘양백’으로 불린 민족주의자였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방송평론가 신규호는 “<거부실록>이 사회적인 화제를 몰고 왔던 것은 드라마의 내용에 잘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프로그램의 특수한 기본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기획의도를 평가하고 “단순히 남의 사생활이나 들추어 흥미를 제공하는 따위의 오락물이 아닌 수준높은 문화적 창작 활동으로 공익을 위한 목적으로, 설사 사실에 약간의 윤색이나 과장이 끼었다 치더라도 본질적인 부분에 거짓이 없다면, 또 진실과 다른 소재라 하더라도 그에 관한 확실한 자료나 근거가 있다든지, 그렇게 믿게된 연유에 과실이 없다면 정당한 작품 활동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희제가 장덕수에게 독립자금을 건넨 장면이나 제3자를 통해 김구에게 거금을 건넨 장면의 시시비비에 대한 논평이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되도록 진실에 근접되게 드라마를 꾸며내는 작가정신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 같고 극의 품격을 지켜내는 연출 솜씨 또한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거부실록> ‘백산 안희제’(오지명·오른쪽)편은 정덕수와 김구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을 두고 역사 고증 논란을 빚기도 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독립자금을 조달한 민족자본가 ‘백산 안희제’편은 때마침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 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져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문화방송 제공

‘공주갑부 김갑순’의 인기 비결은 단연 사회현상의 거울 효과이다. ‘민나 도로보데스’(일본말로 ‘모두가 도둑이다’)가 세태를 풍자하며 시류를 반어법으로 그려 나가는 재미에 시청자들이 빠져들 때, 문제의 ‘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의 처제로 사채시장을 주무른 ‘큰손’ 장영자가 1982년 5월 첫 공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세간에선 젊은 미모에 또 한번 화제를 모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2년 5월20일, 최고 권력자의 인척이자 유신체제 이래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저지른 거액 어음부도 사건. 대통령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인 장영자와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회 의원을 지낸 이철희 부부는 권력의 후원을 앞세워 자기자본율이 약한 일단의 건설업체와 접촉해,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해주는 대신 담보조로 대여액의 2배에서 9배에 이르는 액수의 어음을 받고, 그것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자금을 조성하는 한편, 주식투자를 하는 수법으로 6천억이 넘는 어음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장영자의 또다른 수법은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의 환수자금을 이용한 착취다. 그야말로 ‘민나 도로보데스!’, 장영자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장영자가 ‘땡전뉴스’를 제치고 메인뉴스의 헤드라인을 도배하면서 유명세가 대단했다. 드라마 연습장에서 탤런트들 사이에도 “우리는 다 죽었다. 장영자보다 이쁜 사람 나와봐”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였다. 그 덕분에 ‘공주갑부 김갑순’의 화제는 더 만발했다.

19세기 후반 공주에서 태어난 관노 출신인 김갑순은 일제강점기 매관매직으로 충청도 6개 지역 군수를 지내며 공주와 대전 일대 땅을 사들여 부를 쌓아 ‘땅투기꾼 1호’이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사진 <친일파는 살아있다> 중에서.
김갑순은 누구인가? 1872년 고종 9년 김현의 차남으로 출생, 그런데 아버지와 형이 요절하며 13살에 가난한 소년가장이 되었다. 먹고살아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보부상을 따라다녔다. 여기서 이용익을 보게 된다. 축지법을 쓴다 할 만큼 발이 빠른 이용익을 김갑순은 쫓았다. 이용익에게서 보부상의 이재를 터득하고 돈을 모았다. 1900년 김갑순은 첫번째 매관매직을 감행한다. 관학분(주사급)에 오르고 관에서 도는 정보에 귀 기울인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모하고 그 발판으로 철도건설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이 퍼지고, 노선이 알려지자 공주의 유생들이 철도건설을 반대하고 나선다. 경부선의 노선이 변경될 처지에 놓인다. 김갑순은 식산은행으로부터 저금리의 융자를 받아 대전과 유성 쪽의 황무지 땅을 사들인다. 무려 20만평. 1905년 서울과 초량 간 445㎞ 경부선이 대전을 경유하면서 김갑순은 갑부 대열에 오른다. 그의 매관매직은 계속된다. 1906년 공주 군수, 1910년 아산 군수, 김갑순의 황무지 개발 또한 계속된다. 1930년엔 천만평을 사들여 온양온천을 개발하고 극장을 여러 군데 지어서 문화사업에도 눈독을 들인다. 그는 또 대전의 땅을 사들인다. 곧이어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데, 대전의 부지 57만평 가운데 22만평이 김갑순의 땅이다. 배꽃문양 기둥을 한 대전시 청사가 들어선 건 1932년, 김갑순은 재벌의 반열에 등극한다. 어여쁜 첩도 둘씩 집에 들인다. 김갑순의 집에서 경옥고 끓이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했다 한다. 경옥고를 끓이던 하인이 가마솥 뚜껑을 열고 조금이나마 간을 보는 재미에 밤새는 줄 모르고 불을 지폈다고 한다.

‘공주갑부 김갑순’의 인기 비결은 ‘민나 도로보데스’ 유행어와 더불어 김갑순의 인간적인 면모와 주인공 박규채 특유의 해학적 연기 덕분이었다. 박규채. 고려대 시절 연극에 빠져 <한국방송>에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 얘기했다. “<수사반장>의 주인공은 최불암이 아니라 범인들이다.” 그 자신 <수사반장>에서만 16번 교도소에 들어갔다 왔다. 훗날 <박순경>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그 한을 풀었지만 범인 역만 전문으로 하는 것이 못내 싫었던 모양이다. 그의 풍모에서는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기지만 연기는 깊이가 있었다. <제1공화국>에서는 ‘이기붕’을 빼다 박았다. 2인자 역의 이기붕은 서 있으되 없는 듯, 투명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그것은 역할로부터 초탈의 경지에 돌입해야 한다. 어느 연기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싶겠는가. 그런데 가능한 한 묻어가는 연기자가 그였다. 그것은 평소의 심성을 닮은 것이다. <제1공화국> 38회 동안 단 한번도 눈에 띄질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양자 이강석’ 편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온양온천장에서 아들 이강석이 등을 밀어줄 때, 김 서린 뿌연 화면을 뒤로하고 서럽게 울고 있는 이기붕, 박규채를 보았다. 38회 동안 그림자 연기를 펼치던 박규채의 눈물이었다. 잠시 후 가족 네명이 권총자살 하는 충격적인 스토리를 들으며, 박규채의 눈물을 떠올렸다. 박규채, 그 내공은 그대로 <거부실록>에서 발현된다. 그림자가 일어서고 형체로 그려지는 형국은 죽은 시체에서 영혼이 빠져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김갑순’은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였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금방 유행어가 되어 떠돌아다녔다. “민나 도로보데스”에서부터 뒤이은 <야망의 25시>에서 “나 돈 없시유”, “당신 미인이야요”에 이르기까지 박규채의 연기는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요동치는 격이었다.

공주갑부 김갑순은 매관매직으로 따낸 군수이지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본인이 돈이 많으니 가난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 일도 없고, 주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도 명쾌하게 해결해주어 훗날 ‘솔로몬 판정’을 능가했다는 평판도 자자했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적 대리만족도 작용했으리라.

박규채와 김갑순의 공통점. 박규채는 물욕이 없어 보였다. 밥도 잘 사고, 궂은 일에 솔선수범했다. 사회사업도 훌륭하게 했다. 방송가에서도 맘 좋은 아저씨지만 정치권 인사들도 좋아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선거운동도 도와주고 관직에도 짧게 앉게 되었다. 그 이후 연기자의 불길은 꺼져갔다. 그리고 평생 놓지 않고 있던 사회봉사의 끈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취재차 만나본 그의 노년이 아름다웠다.

공주갑부 김갑순은 해방과 함께 급격한 몰락을 맞게 된다.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으로 재산은 거의 환수되고, 1949년 반민특위 때 불려갔다 보석으로 풀려나는 고초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김갑순은 역전을 노리며, 잘 생긴 첩의 아들 둘을 ‘5·10총선’에 내세우지만 참패하고 만다. 이 선거로 모든 재산을 깡그리 다 날렸다. 김갑순은 89살까지 살다가, 어느날 찹쌀떡 하나 먹다가 목에 걸려 죽었다. 한 재벌의 허망한 죽음까지도 화제가 되었다 한다.

[%%IMAGE11%%] 6·25 때 김기팔 작가는 공주로 피난을 갔고 여기서 김갑순의 입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때 어느 누구도 김갑순을 비난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한다. 왜 그랬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 풍자의 소재가 된 재벌, 그 재벌들의 이야기, 그것도 오늘날의 재벌들을 다음주부터 몇차례에 걸쳐 만나게 된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